동국통감 22ㅡ가야 우륵

신라 진흥왕 2년, 고구려 안원왕 11년, 백제 성왕 19년, 신유년(辛酉年), 541년, 중국연호 양나라 무제 대동 7년
봄
○신라에서 이사부(異斯夫)를 제배(除拜)하여 병부령(兵部令)으로 삼고, 내외 병마(內外兵馬)의 일을 관장하게 하였다.
○백제에서 사신을 보내어 양(梁)나라에 가서 표문(表文)으로 모시 박사(毛詩博士)와 열반 경의(涅槃經義)와 공장(工匠)과 화사(畵師) 등을 청하니, 그대로
신라 진흥왕 5년, 고구려 안원왕 14년, 백제 성왕 22년, 갑자년(甲子年), 544년, 중국연호 양나라 무제 대동 10년
봄 2월
○신라에 흥륜사(興輪寺)가 완성되었다.
봄 3월
○왕이 도첩(度牒)을 허가한 사람에게 승니(僧尼)가 되게 하고 부처를 받드는 데 부지런하여 널리 사찰(寺刹)을 일으켰다.
신라 진흥왕 6년, 고구려 안원왕 15년 · 양원왕 원년, 백제 성왕 23년, 을축년(乙丑年), 545년, 중국연호 양나라 무제 대동 11년

봄 3월
○고구려왕 보연(寶延)이 훙(薨)하니, 호를 안원왕(安原王)이라 하였으며, 태자 평성(平成)이 왕위에 즉위하였다.
가을 7월
○신라에서 국사(國史)를 수찬(修撰)하라고 명하였다. 이찬(伊飡) 이사부(異斯夫)가 청하기를, “국사는 임금과 신하의 선악(善惡)을 기록하여 후대(後代)에 포폄(褒貶)을 보이는 것인데, 진실로 수찬하지 않는다면 후대에 무엇을 보겠습니까?” 하니, 왕이 깊이 수긍하고 대아찬(大阿飡) 김거칠부(金居漆夫) 등에게 명하여 문사(文士)를 모아서 수찬하게 하였다.
신라 진흥왕 9년, 고구려 양원왕 4년, 백제 성왕 26년, 무진년(戊辰年), 548년, 중국연호 양나라 무제 태청(太淸) 2년
봄 정월
○고구려에서 백제를 침략하자, 신라에서 군사를 보내어 구원하였다. 이때에 고구려왕이 예(濊)의 군사 6천으로써 한북(漢北)의 독산성(獨山城)을 공격하매, 백제왕이 신라에 구원을 청하니, 신라왕이 장군 주진(朱珍)에게 명하여 갑병(甲兵) 3천을 거느리고 이를 구원하게 하였다. 주진이 독산성 아래에 이르러 고구려 군사와 싸워서 크게 격파시켰는데, 죽이거나 사로잡은 것이 몹시 많았다.
신라 진흥왕 10년, 고구려 양원왕 5년, 백제 성왕 27년, 기사년(己巳年), 549년, 중국연호 양나라 무제 태청 3년
○양(梁)나라에서 사신을 보내어 신라에 불사리(佛舍利)를 보내니, 왕이 백관으로 하여금 흥륜사(興輪寺) 앞길에서 받들어 맞이하게 하였다. 처음에 신라의 중[僧] 각덕(覺德)이 양나라에 들어가 불법을 구하다가 이에 이르러 양나라 사신과 더불어 함께 나온 것이다.
겨울 10월
○백제에서 사신을 보내어 양나라에 가게 하였다. 처음에 백제왕이 양나라에 후경(侯景)의 난(亂)이 있는 것을 알지 못하고 사신을 보내어 조공(朝貢)하였는데, 사신이 양나라에 이르러 성곽과 궁궐이 잔혹하게 훼손된 것을 보고 단문(端門) 밖에서 울부짖으니, 보는 자가 눈물을 뿌리지 않은 이가 없었다. 후경이 이를 듣고 크게 노하여 잡아 가두었는데, 후경의 난이 평정되어서야 돌아오게 되었다.
○신라에서 무관(武官)을 더 설치하였다.
신라 진흥왕 11년, 고구려 양원왕 6년, 백제 성왕 28년, 경오년(庚午年), 550년, 중국연호 양나라 간문제(簡文帝) 대보(大寶) 원년
봄
○백제왕이 장군 달기(達己)를 보내어 군사 1만을 거느리고 고구려의 도살성(道薩城)을 공격하여 빼앗고,

고구려는 백제의 금현성(金峴城)을 공격하여 함락시키니, 신라왕이 두 나라의 군사가 피로한 틈을 타서 이찬(伊飡) 이사부(異斯夫)에게 명하여 군사를 출동시켜 공격해서 두 성을 빼앗아 증축(增築)하고 갑사(甲士) 1천 명으로 머물러 지키게 하였다.
여름 6월
○고구려에서 사신을 보내어 북제(北齊)에 조빙하였다.
가을 9월
○북제에서 고구려왕을 책봉하여 사지절 시중 표기대장군 영호동이교위 요동군개국공 고구려왕(使持節侍中驃騎大將軍領護東夷校尉遼東郡開國公高句麗王)으로 삼았다.
신라 진흥왕 12년, 고구려 양원왕 7년, 백제 성왕 29년, 신미년(辛未年), 551년, 중국연호 양나라 간문제 대보 2년
봄 정월
○신라에서 연호를 고치니 개국(開國)이라 하였다.
봄 3월
○신라왕이 낭성(娘城)에 가서 우륵(于勒)과 그의 제자인 이문(尼文)을 하림궁(河臨宮)에서 불러보고 그에게 음악을 연주하게 하니, 두 사람이 각각 하림(河臨)·눈죽(嫩竹) 두 가락을 지어 연주하였는데, 곡조가 모두 1백 85곡(曲)이었다. 이에 앞서 가야국왕(伽耶國王) 가실(嘉悉)이 당악부(唐樂部)의 쟁(箏)을 본떠서 12현금(十二絃琴)을 만든 것이 12월을 상징한 것이나, 곧 여러 나라의 방언(方言)이 각각 다르고 성음(聲音)은 통일하기가 어려우므로 악사(樂師) 우륵(于勒)에게 명하여 12곡(曲)을 짓게 하였으니, 하가도(下加都)·상가라도(上加羅都)·보기(寶伎)·달기(達己)·사물(思勿)·물혜(勿慧)·하기물(下奇物)·사자기(師子伎)·거열(居烈)·사팔혜(沙八兮)·이혁(爾赥)·상기물(上奇物)이란 것이며, 이문이 지은 것이 또한 3곡이 있는데, 오(烏)·서(鼠)·순(鶉)이란 것이다. 그 후에 우륵 등이 나라가 장차 어지러울 것을 알고 악기(樂器)를 가지고 신라에 귀화하니, 왕이 이들을 국원(國原)에 두게 하였다.
가을 9월
○돌궐(突厥)이 고구려의 신성(新城)을 포위하였으나 이기지 못하매 백암성(白巖城)으로 옮겨서 공격하였다. 고구려왕이 장군 고흘(高紇)을 보내어 군사 1만을 거느리고 공격하게 하니, 죽이거나 사로잡은 것이 1천여 급(級)이었다.
○신라에서 장수 거칠부(居漆夫) 등을 보내어 고구려의 10군(郡)을 공격하여 취하였다.

거칠부는 내물왕(奈勿王)의 5세손으로 젊어서 원대한 뜻이 있었다. 처음에 중이 되어 고구려의 강하고 약함을 엿보려고 그 경내(境內)에 들어갔다가 법사(法師) 혜량(惠亮)이 강당(講堂)을 열고 경문을 강설(講說)한다는 말을 듣고는 드디어 나아가 강설을 들었다. 하루는 혜량이 묻기를, “그대는 어디서 왔는가?” 하니, 거칠부는 신라 사람이라고 하였다. 혜량이 손을 잡고 은밀히 말하기를, “나는 많은 사람을 겪어 왔는데, 그대의 용모를 보니 정녕 보통 사람이 아니다. 자못 다른 마음이 있음에랴?” 하였다. 거칠부가 말하기를, “내가 편방(偏方)에서 태어나 도리(道理)를 듣지 못하였다가 스승의 덕망과 명성을 듣고 와서 말석(末席)에 참여하게 되었으니, 원컨대 스승께서는 거절하지 마소서.” 하니, 혜량이 말하기를, “노승(老僧)이 불민(不敏)하나 또한 능히 그대를 알아보았으니, 이 나라가 비록 작지만 인물이 없다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대가 잡힐까 두려우니, 빨리 돌아가는 것이 좋겠다.”고 하였다. 거칠부가 돌아가려 할 때에 혜량이 말하기를, “그대는 제비턱에 매의 눈초리라 반드시 장수가 될 상이다. 다른 날에 나에게 해를 끼치지나 말라.” 하니, 거칠부가 말하기를, “과연 말한 바와 같다면, 스승과 더불어 상호(相好)하지 않을 경우 저 밝은 해를 두고 맹세하겠습니다.” 하고, 드디어 돌아가 벼슬이 파진찬(波珍飡)에 이르렀다. 이에 이르러 왕이 거칠부와 대각찬(大角飡) 구진(仇珍) 등 8장군(將軍)에게 명하여 백제와 더불어 고구려를 침략하게 하였는데, 백제는 먼저 평양(平壤)을 공격하여 깨뜨리고 거칠부 등은 승승 장구(乘勝長驅)로 죽령(竹嶺) 밖과 고현(高峴) 안의 10군(郡)을 취하였다. 이때에 혜량이 그 무리를 거느리고 길에서 뵈니, 거칠부가 말하기를, “일찍이 스승의 은혜를 입어 성명(性命)을 보전하였는데, 오늘날 무엇으로 보답해야겠습니까?” 하니, 혜량이 말하기를, “우리나라는 정사가 어지러워 멸망할 날이 얼마 안 남았다.” 고 하였다. 거칠부가 그와 더불어 돌아와 왕에게 보이니, 왕이 혜량을 승통(僧統)으로 삼고, 비로소 백좌 강회(百座講會)와 팔관(八關)의 법을 설치하였다.
신라 진흥왕 13년, 고구려 양원왕 8년, 백제 성왕 30년, 임신년(壬申年), 552년, 중국연호 양나라 원제(元帝) 승성(承聖) 원년
○신라왕이 법지(法知)·계고(階古)·만덕(萬德) 등에게 명하여 우륵(于勒)에게 음악을 배우게 하였는데,

우륵이 그 재질(材質)에 따라 계고에게는 금(琴)을 법지에게는 노래를 만덕에게는 춤을 가르쳤다. 학업이 이루어지자 이를 연주하였는데, 왕이 말하기를, “전일 낭성(娘城)에서 듣던 음악과 다름이 없다.” 하고, 이에 상을 후하게 주었다. 3인이 이미 전해 온 12곡(曲)에 대하여 서로 이르기를, “이 음악은 번다하고 음란하여 청아하지 못하다.” 하고, 드디어 요약하여 5곡(曲)으로 만들었다. 우륵이 처음 이 소식을 듣고는 노여워하였다가 음악을 듣게 되어서는 마침내 감탄하기를, “즐거우면서도 방탕하지 않고 애절하면서도 슬프지 않으니, 정당하다 하겠다.” 하였다. 드디어 그것을 연주하니, 왕이 크게 기뻐하였다. 간(諫)하는 자가 말하기를, “가야(伽耶)의 망국(亡國)의 음악은 족히 취할 것이 못됩니다.” 하니, 왕이 말하기를, “가야왕이 음란하여 스스로 멸망한 것이지 음악에 무슨 관계가 있겠는가? 대개 성인이 음악을 제정함에 있어 인정(人情)에 연유하여 조절하였으나, 나라가 다스려지고 어지러워짐은 음조(音調)에 연유한 것이 아니다.” 하고, 드디어 사용케 하였으니, 그 금(琴)을 이름하여 ‘가야금(伽耶琴)’이라고 하였다. 그리고 또 현금(玄琴, 거문고)이 있었다. 처음에 진(晉)나라 사람이 칠현금(七絃琴)을 고구려에 보냈는데, 고구려 사람이 이것을 두드리는 법을 알지 못하였다. 이때에 국상(國相) 왕산악(王山岳)이 그대로 모양을 본땄으나 자못 그 제도를 고쳤고 겸하여 1백여 곡을 지어 연주하니, 현학(玄鶴)이 와서 춤을 추었으므로 드디어 ‘현학금(玄鶴琴)’이라 이름하였다가 그 후에 ‘현금’이라 칭하였다. 그리고 옥보고(玉寶高)란 자가 지리산(地理山) 운상원(雲上院)에 들어가 거문고를 배운 지 50년에 스스로 새 곡조를 지었으니, 상원곡(上院曲) 1, 중원곡(中院曲) 1, 하원곡(下院曲) 1, 남해곡(南海曲) 2, 의암곡(倚巖曲) 1, 노인곡(老人曲) 7, 죽암곡(竹菴曲) 2, 현합곡(玄合曲) 1, 춘조곡(春調曲) 1, 추석곡(秋夕曲) 1, 오사식곡(吾沙息曲) 1, 원앙곡(鴛鴦曲) 1, 원점곡(遠岾曲) 6, 비목곡(比目曲) 1, 입실상곡(入實相曲) 1, 유곡 청성곡(幽谷淸聲曲) 1, 강천성곡(降天聲曲) 1이었다. 무릇 30곡을 속명득(續命得)에게 전하고 속명득은 귀금(貴金)에게 전했는데, 귀금 또한 지리산에 들어가 나오지 않았다. 왕이 금도(琴道)가 전하여지지 못할까 두려워하여 이찬(伊飡) 윤흥(允興)을 남원수(南原守)로 삼아서 그 업(業)을 전하게 하였다. 윤흥이 안장(安長)·청장(淸長) 2인을 보내어

산중(山中)에 가서 배우게 하였으나 귀금이 비법을 죄다 전하여 주지 않으니, 윤흥이 친히 가서 예를 다한 연후에야 그의 비법이었던 표풍(飄風) 등 3곡을 전하여 주었다. 안장은 그의 아들인 극종(克宗)에게 전했는데, 극종은 7곡을 지었다. 극종의 뒤에는 거문고를 직업으로 하는 자도 많았으나, 지은 음곡(音曲)으로는 두 곡조가 있는데, 1은 평조(平調), 2는 우조(羽調)로 모두 1백 87곡이었으며, 그 나머지 성곡(聲曲)으로 전하여 기록할만한 것은 얼마 되지 않는다. 향비파(鄕琵琶)는 또 당제(唐制)와 대동소이(大同小異)하고 그 음악에 3조(調)가 있는데, 1은 궁조(宮調), 2는 칠현조(七賢調), 3은 봉황조(鳳凰調)로 모두 2백 12곡이다.
○고구려에서 장안성(長安城)을 쌓았다.
신라 진흥왕 14년, 고구려 양원왕 9년, 백제 성왕 31년, 계유년(癸酉年), 553년, 중국연호, 양나라 원제 승성 2년
봄 2월
○신라에서 신궁(新宮)을 폐하고 황룡사(皇龍寺)로 삼았다. 처음에 왕이 월성(月城) 동쪽에 궁을 지으라고 명하였는데, 황룡(黃龍)이 그곳에 나타났기 때문에 인하여 (신궁을) 폐하고 불사(佛寺)를 삼았으며, 황룡이란 칭호를 내렸다.
가을 7월
○신라에서 백제의 동북 변경(邊境)을 취하여 신주(新州)를 두고 아찬(阿飡) 김무력(金武力)을 군주(軍主)로 삼았다.
겨울 10월
○신라왕이 백제왕의 딸을 취하여 소비(小妃)로 삼았다.
신라 진흥왕 15년, 고구려 양원왕 10년, 백제 성왕 32년 · 위덕왕 원년, 갑술년(甲戌年), 554년, 중국연호 양나라 원제 승성 3년
가을 7월
○신라에서 명활성(明活城)을 수축하였다.
○백제왕 명농(明禯)이 군사를 거느리고 신라를 침략하였는데, 군주(軍主) 김무력(金武力)이 공격하여 그를 죽였다. 이에 앞서 백제가 신라와 더불어 합병(合兵)하여 고구려를 치려고 꾀하니, 신라왕이 말하기를, “나라의 흥망(興亡)이 하늘에 달려 있으니, 만약 하늘이 고구려를 싫어하지 않는다면 우리가 어찌 감히 바라겠는가?” 하고, 이에 고구려와 통하니, 고구려가 그 말에 감동하여 신라와 더불어 통호(通好)하기 때문에,

백제왕이 이를 원망하여 친히 보병과 기병을 거느리고 와서 관산성(管山城)을 공격하였다. 군주(軍主)인 각간(角干) 우덕(于德)과 이찬(伊飡) 탐지(耽知) 등이 맞아 싸웠으나 불리하므로 김무력이 영솔(領率)한 신주(新州)의 군사로 나아가 싸웠는데 비장(裨將)인 고간(高干) 도도(都刀)가 백제왕을 쳐 죽였다. 여러 군사가 승세를 타서 크게 이겼으며, 좌평(佐平) 4인과 사졸 2만 9천 6백 인을 베니, 말 한 필도 돌아간 자가 없었다.
○백제에서 왕의 시호를 성(聖)이라 하고, 아들 창(昌)이 왕위에 즉위하였다.
신라 진흥왕 18년, 고구려 양원왕 13년, 백제 위덕왕 4년, 정축년(丁丑年), 557년, 중국연호 진(陳)나라 무제(武帝) 영정(永定) 원년
여름 4월
○고구려왕이 아들 양성(陽成)을 세워 태자로 삼았다.
○신라에서 국원(國原)을 소경(小京)으로 삼았다.
신라 진흥왕 19년, 고구려 양원왕 14년, 백제 위덕왕 5년, 무인년(戊寅年), 558년, 중국연호 진나라 무제 영정 2년
봄 2월
○신라에서 귀척(貴戚)의 자제(子弟)와 육부(六部)의 호민(豪民)을 옮겨서 국원(國原)을 채우고, 내마(奈麻) 신득(身得)이 포노(砲弩)를 만들어 성에 설치하였다.
신라 진흥왕 20년, 고구려 양원왕 15년 · 평원왕 원년, 백제 위덕왕 6년, 기묘년(己卯年), 559년, 중국연호 진나라 무제 영정 3년
봄 3월
○고구려왕 평성(平成)이 훙(薨)하니, 호를 양원(陽原)이라 하였다. 태자 양성(陽成)이 왕위에 즉위하였다.
신라 진흥왕 21년, 고구려 평원왕 2년, 백제 위덕왕 7년, 경진년(庚辰年), 560년, 중국연호 진나라 문제(文帝) 천가(天嘉) 원년
봄 2월
○북제(北齊)에서 고구려왕을 책봉하여 사지절 영동이교위 요동군공 고구려왕(使持節領東夷校尉遼東郡公高句麗王)으로 삼았다.
신라 진흥왕 22년, 고구려 평원왕 3년, 백제 위덕왕 8년, 신사년(辛巳年), 561년, 중국연호 진나라 문제 천가 2년
겨울 11월
○고구려에서 사신을 보내어 진(陳)나라에 조빙(朝聘)하였다.
신라 진흥왕 23년, 고구려 평원왕 4년, 백제 위덕왕 9년, 임오년(壬午年), 562년, 중국연호 진나라 문제 천가
봄 2월

○진나라에서 조서(詔書)를 내려 고구려왕에게 영동 장군(寧東將軍)을 제수하였다.
가을 9월
○신라에서 대가야(大加耶)를 멸하였다. 이때에 가야가 배반하므로 왕이 이찬(伊飡) 이사부(異斯夫)에게 명하여 치게 하고 사다함(斯多含)으로 비장(裨將)을 삼았다. 사다함은 내물왕의 7대손으로, 나이 16세에 국선(國仙)이 되어 그의 무리가 1천여 인이었다. 이에 이르러 종군(從軍)할 것을 청하였으나 왕이 나이 어리다는 것으로써 허락하지 않다가, 굳이 청해서야 허락하였다. 가야에 이르러 휘하(麾下)의 5천 기병(騎兵)을 거느리고 먼저 전단문(栴檀門)으로 들어가 백기(白旗)를 세우니, 성중(城中)이 놀라 두려워하였다. 이에 이사부가 군사를 이끌고 임하여 드디어 그 나라를 멸하고, 그 땅을 대가야군(大伽耶郡)으로 삼았다. 군사가 돌아와 공을 기록함에 사다함을 으뜸으로 삼았다. 왕이 양전(良田)과 포로 3백 인을 상으로 주니, 굳이 사양하다가 왕이 강권(强勸)하여서야 받아서 그 양전은 전사(戰士)에게 나누어 주고, 다만 알천(閼川)의 불모지(不毛地)만 받았으며, 생포한 사람은 놓아 주어 양인(良人)을 만들어서 하나도 머물러 두지 않으니, 나라 사람들이 이를 아름답게 여기었다. 사다함이 처음에 무관랑(武官郞)과 더불어 사우(死友)가 되기를 약속하였는데, 무관랑이 (병들어) 죽자 통곡하다가 7일 만에 또한 졸(卒)하였으니, 나이 17세였다.
신라 진흥왕 24년, 고구려 평원왕 5년, 백제 위덕왕 10년, 계미년(癸未年), 563년, 중국연호 진나라 문제 천가 4년
여름
○고구려에 큰 가뭄이 들어 왕이 감선(減膳, 임금의 수랏상에 음식 가짓수를 줄임)하고 산천(山川)에 기도하였다.
신라 진흥왕 25년, 고구려 평원왕 6년, 백제 위덕왕 11년, 갑신년(甲申年), 564년, 중국연호 진나라 문제 천가 5년
○신라에서 사신을 보내어 북제(北齊)에 조빙하였다.
○고구려에서 사신을 보내어 북제에 조빙하였다.
신라 진흥왕 26년, 고구려 평원왕 7년, 백제 위덕왕 12년, 을유년(乙酉年), 565년, 중국연호 진나라 문제 천가 6년
봄 정월
○고구려왕이 아들 원(元)을 세워 태자로 삼았다.
봄 2월
○북제(北齊)에서 신라왕을 책봉하여 사지절 동이교위 낙랑군공 신라왕(使持節東夷校尉樂浪郡公新羅王)으로 삼았다.

신라 진흥왕 27년, 고구려 평원왕 8년, 백제 위덕왕 13년, 병술년(丙戌年), 566년, 중국연호 진나라 임해왕(臨海王) 천강(天康) 원년
봄 2월
○신라왕이 아들 동륜(銅輪)을 세워 태자로 삼았다.
○신라에서 사신을 보내어 진나라에 조빙하였다.
○신라에 황룡사(皇龍寺)가 완성되자 솔거(率居)라는 자가 있어 벽에 노송(老松)을 그렸는데, 체간(體幹)이 선명하게 주름이 지고 가지와 잎이 서리고 구부러져서 새[鳥雀]들이 이따금씩 이것을 바라보고 날아들다가 실족하여 떨어지곤 하였다. 그림이 오래 되어 빛깔이 바래자 절의 중이 단청(丹靑)으로 보수하였는데, 새들이 다시는 오지 않았다. 그리고 분황사(芬皇寺)·단속사(斷俗寺)의 불상(佛像)은 모두 솔거의 수적(手蹟)인데, 세상에서 신화(神畵)라고 일컬었다.
○신라왕이 백운(白雲)·제후(際厚)·김천(金闡) 등 3인에게 관작(官爵) 3급(級)을 내려 주었다. 처음에 두 달관(達官)이 있어 집이 같은 마을이었는데, 같은 때에 아들과 딸을 낳았으니, 아들은 백운, 딸은 제후(際厚)였다. 두 집이 혼인하기로 약속하였더니, 백운이 나이 14세에 국선(國仙)이 되었다가 15세에 장님이 되었으므로, 제후의 부모가 다시 무진 태수(茂榛太守) 이교평(李佼平)에게 혼인시키려고 하였다. 제후가 장차 무진으로 가게 되자 은밀히 백운에게 말하기를, “첩(妾)이 그대와 더불어 똑같은 시기에 태어나서 부부가 되기로 언약한 지 오래이다. 지금 부모가 옛 약속을 고쳐 새로 이렇게 계획을 하니, 만약 명을 어기면 불효가 되고, 무진으로 시집을 가면 죽고 사는 것은 어찌 나에게 달려 있는 것이 아니겠는가? 그대가 신의(信義)가 있다면 나를 무진으로 와서 찾는 것을 다행으로 여긴다.” 하며, 신의로 맹세하고 떠났다. 제후가 시집가게 되어 이교평에게 이르기를, “혼인은 인도(人道)의 시작으로 길일을 잡아 예를 올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니, 이교평이 그 말을 따랐다. 그런데 백운이 무진으로 찾아가니, 제후가 따라나와 드디어 그와 함께 몰래 가다가 산골에서 갑자기 협객(俠客)을 만났는데 백운을 위협하고 제후를 훔쳐 달아났다. 백운의 무리인 김천은 용력(勇力)이 남보다 뛰어나 말을 잘 타고 활을 잘 쏘므로, 협객을 따라가 죽이고 제후를 빼앗아 돌아왔다. 사실이 왕에게 알려지자, “세 사람의 신의는 가상할 만하다.” 하고, 이런 명이 있게 되었다.

신라 진흥왕 31년, 고구려 평원왕 12년, 백제 위덕왕 17년, 경인년(庚寅年), 570년, 중국연호 진나라 선제(陳宣帝) 태건(太建) 2년
○북제(北齊)에서 백제왕을 책봉하여 사지절 시중 거기대장군 대방군공 백제왕(使持節侍中車騎大將軍帶方郡公百濟王)으로 삼았다.
신라 진흥왕 32년, 고구려 평원왕 13년, 백제 위덕왕 18년, 신묘년(辛卯年), 571년, 중국연호 진나라 선제 태건 3년
○북제(北齊)에서 백제왕을 책봉하여 사지절 도독 동청주제군사 동청주자사(使持節都督東靑州諸軍事東靑州刺使)로 삼았다.
신라 진흥왕 33년, 고구려 평원왕 14년, 백제 위덕왕 19년, 임진년(壬辰年), 572년, 중국연호 진나라 선제 태건 4년
봄 정월
○신라에서 연호를 고치어 홍제(鴻濟)라 하였다.
○신라왕의 태자 동륜(銅輪)이 졸(卒)하였다.
○백제에서 사신을 보내어 북제(北齊)에 조빙하였다.
겨울 10월
○신라에서 전사(戰死)한 사졸(士卒)을 위하여 불사(佛寺)에다 팔관회(八關會)를 베풀었는데, 7일 동안 하였다.
신라 진흥왕 35년, 고구려 평원왕 16년, 백제 위덕왕 21년, 갑오년(甲午年), 574년, 중국연호 진나라 선제 태건 6년
봄 3월
○신라에서 황룡사(皇龍寺)에 장륙상(丈六像)을 주조(鑄造)하였는데, 동(銅)이 3만 5천 7근(斤)이었고, 도금(鍍金)한 것이 1백 2냥(兩)이었다.
신라 진흥왕 37년 · 진지왕 원년, 고구려 평원왕 18년, 백제 위덕왕 23년, 병신년(丙申年), 576년, 중국연호 진나라 선제 태건 8년
봄
○신라에서 화랑(花郞)을 설치하였다. 처음에 임금과 신하가 인재(人材)를 알아볼 수 없음을 근심하여, 같은 부류끼리 모으고 떼지어 놀게 하여 그 행의(行義)를 보아 들어 쓰려고 하여 드디어 미녀(美女) 두 사람을 가려서 받들게 하여 원화(源花)로 삼았다. 하나는 남모(南毛)라 하고 하나는 준정(俊貞)이라 하여 무리 3백여 인을 모았는데, 어여쁨을 시새워서 서로 투기하여 준정이 자기 집에다 술을 준비해 놓고 남모에게 억지로 권하여 술에 취하자 이를 죽이니, 그 무리가 고하여 준정도 복주(伏誅)됨으로써 드디어 원화를 폐하였다. 그 후 다시 미남자(美男子)를 뽑아 곱게 단장하여 ‘화랑(花郞)’이라 이름하였는데, 그 무리가 날로 많아져

혹은 도의(道義)를 서로 연마하고, 혹은 가악(歌樂)으로 서로 즐기며 산수(山水)를 유람하여 먼 곳까지 가보지 않은 곳이 없었다. 세월이 이미 오래되어 간사하고 정직함이 스스로 나타나자 그중에서 예망(譽望)이 많은 자를 가려서 썼다.
가을 8월
○신라왕 삼맥종(彡麥宗)이 훙(薨)하였다. 왕은 어린 나이에 즉위(卽位)하여 오직 부처를 받드는 데 부지런하였으며, 말년에는 머리를 깎아 중 옷[僧衣]을 입고 스스로 법운(法雲)이라 불렀다. 왕비 또한 여승(女僧)이 되어 영흥사(永興寺)에 머물렀다. 왕이 훙하니 시호를 진흥(眞興)이라 하였으며, 왕의 아들 김윤(金輪)이 왕위에 즉위하였다.
[신(臣)등은 살펴보건대,]
“불씨(佛氏)는 세속(世俗)을 떠나 천륜(天倫)을 끊고 인류(人類)를 버리니, 진실로 천하 국가에서 임금된 이가 할 짓이 못됩니다. 소양(蕭梁, 양(梁)나라 무제(武帝))은 자신을 버리고 종[奴]이 되어 만대에 웃음을 끼쳤으나, 그 자신만을 버리는 데 그쳤고, 그의 비(妃)까지 버리게 하였다는 것은 듣지 못하였습니다. 그런데 이제 왕과 비가 동시에 머리를 깎았으니, 장차 어떻게 종사(宗社)를 받들고 군신(群臣)에게 임하겠습니까? 이는 반드시 온 나라의 사녀(士女)가 머리를 깎은 연후에야 그칠 것입니다. 왕이 비록 청정 과욕(淸淨寡欲)을 흠모한 것이라 하나, 능히 국가를 버리거나 부부의 인연을 끊지 못하고 군(君)이니 비(妃)니 일컬으며 태연자약하다면, 또 어찌 그 청정 과욕함에 있다고 하겠습니까? 이는 특히 인도(人道)의 죄인일 뿐 아니라 또한 불씨의 죄인이니, 신라가 마침내 불법으로 쇠퇴하여 패망한 것이 또한 마땅하지 않겠습니까?”
신라에서 이찬(伊飡) 김거칠부(金居漆夫)를 상대등(上大等)으로 삼고 군국(軍國)의 일을 맡기었다.
(네이버 지식백과, 국역 동국통감, 1996, 세종대왕기념사업회에서 인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