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국통감 23ㅡ평강공주와 온달

2023. 3. 3. 17:17History of Korea/신라,백제,고구려,고려

신라 진지왕 2년, 고구려 평원왕 19년, 백제 위덕왕 24년, 정유년(丁酉年), 577년, 중국연호 진나라 선제 태건 9년

가을 7월

○백제에서 사신을 보내어 진(陳)나라에 조빙하였다.

겨울 11월

○백제에서 사신을 보내어 후주(後周)에 조빙하였다.

○고구려에서 사신을 보내어 후주(後周)에 조빙하니, 후주에서 왕을 책봉하여 개부의동삼사 대장군 요동군개국공 고구려왕(開府儀同三司大將軍遼東郡開國公高句麗王)으로 삼았다.

신라 진지왕 3년, 고구려 평원왕 20년, 백제 위덕왕 25년, 무술년(戊戌年), 578년 진나라 선제 태건 10년

○백제에서 사신을 보내어 후주(後周)에 조빙하였다.

신라 진지왕 4년 · 진평왕 원년, 고구려 평원왕 21년, 백제 위덕왕 26년, 기해년(己亥年), 579년, 중국연호 진나라 선제 태건 11년

가을 7월

○신라왕 김윤(金輪)이 훙(薨)하니, 시호를 진지(眞智)라 하였으며, 태자인 동륜(銅輪)의 아들 백정(伯淨)이 왕위에 즉위하였다.

신라 진평왕 2년, 고구려 평원왕 22년, 백제 위덕왕 27년, 경자년(庚子年), 580년, 중국연호 진나라 선제 태건 12년

○신라에서 이찬(伊飡) 김후직(金后稷)을 병부령(兵部令)으로 삼았다. 김후직은 지증왕(智證王)의 증손(曾孫)인데, 왕이 자못 사냥하기를 좋아하므로 김후직이 간(諫)하기를, “옛날의 임금은 반드시 하루에 만기(萬幾, 임금이 보살피는 여러 가지 정무(政務)) 깊이 생각하고 멀리 염려하여 좌우의 올바른 선비에게 직간(直諫)을 받아들여, 힘써 부지런히 하여 감히 안일하게 즐김이 없은 연후에야 어진 정사가 순수하고 아름다워져서 국가를 보전할 수 있었습니다. 지금 전하께서는 날마다 광부(狂夫)·엽사(獵士)와 더불어 매와 개[鷹犬]로 사냥하는 것을 일삼아 꿩이나 토끼를 쫓아 산야(山野)를 달리면서 능히 스스로 중지하지 못하십니다. 노자(老子)가 말하기를, ‘말을 달려 사냥하는 것은 사람의 마음을 미치게 한다.’ 하였고, 《서경(書經)》에 이르기를, ‘안으로 여색에 빠지거나 밖으로 사냥하는 일에 빠지거나, 한 가지만 여기에 있어도 망하지 아니함이 없다.’ 하였습니다. 이로 말미암아 보건대, 안으로는 마음을 방탕하게 하는 것이요 밖으로는 나라를 망하게 하는 것이니, 반성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전하(殿下)께서는 유념하소서.” 하였으나 왕이 따르지 않자, 또 절히 간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후에 김후직이 병들어 죽게 되자 그 세 아들에게 이르기를, “내가 남의 신하가 되어 능히 임금의 잘못을 바로잡지 못하였다. 왕이 놀고 즐기기를 멈추지 않아 망하는 데 이를까 두려우니, 이것이 나의 근심이다. 비록 죽더라도 임금의 뜻을 깨닫게 할 생각을 가지고 있으니, 내가 죽거든 반드시 왕이 사냥하러 나가는 길 옆에 나를 묻도록 하라.” 하니, 그 아들이 그대로 따랐다. 다른 날 왕이 사냥을 나가는데 도중에서 음성이 들려 마치 ‘왕은 가지 마소서.’ 하는 것 같았다. 왕이 돌아보고 물으니, 종자(從者)가 말하기를, “저것은 김후직의 무덤입니다.” 하고, 드디어 김후직이 

죽을 때에 임하여 말한 것을 진술(陳述)하니, 왕이 눈물을 흘리면서 말하기를, “그대가 살아서 충성으로 간하고, 죽어서도 잊지 않으니, 나를 사랑함이 깊도다. 만약 끝내 고치지 않는다면 무슨 얼굴로 지하(地下)에서 그대를 보겠는가?” 하고, 드디어 종신토록 다시는 사냥하지 않았다.

[권근(權近)이 이르기를,]

“사어(史魚)가 시간(尸諫)하여 전사(前史)에서 이를 아름답게 여기었는데, 이제 김후직이 죽을 때에 왕의 사냥하는 길에 장사지내라고 유언을 하였으니, 다만 왕으로 하여금 보고 감동하여 깨닫게 했을 뿐만 아니라, 또 능히 성기(聲氣)에 의탁하여 부르는 것같이 하여 일깨웠으니, 이는 그 임금을 사랑하는 마음이 지성에서 나왔기 때문에 비록 뼈는 황천에 없어졌더라도 그 정신은 어둡지 않아 지하에서도 근심하다가, 수레와 말을 타고 나가는 것을 보게 되어서는 곧 감촉(感觸)되고 발양(發揚)해서 음성이 들리게 하였으니, 지사(志士)와 인인(仁人)이 어찌 살고 죽는 것으로써 그 마음을 달리하겠는가? 혹자는 이를 괴이하고 허탄하게 여겨 의심을 하는데, 무릇 사람의 정신은 천지 음양과 더불어 서로 유통(流通)되기 때문에 옛날에 지사는 죽어서도 흩어지지 않고 능히 영이(靈異)를 나타내어 결초(結草)의 유(類)와 같은 것이 많았으니, 어찌 홀로 이것을 의심하겠는가?” 하였다.

신라 진평왕 3년, 고구려 평원왕 23년, 백제 위덕왕 28년, 신축년(辛丑年), 581년, 중국연호 진나라 선제 태건 13년

봄 정월

○신라에서 처음으로 위화부(位和府)를 두었다.

겨울 12월

○고구려에서 사신을 보내어 수(隋)나라에 조빙하니, 수나라에서 왕을 책봉하여 대장군 요동군공(大將軍遼東郡公)으로 삼았다.

○백제에서 사신을 보내어 수나라에 조빙하니, 수나라에서 왕을 책봉하여 상개부의동삼사 대방군공(上開府儀同三司帶方郡公)을 삼았다.

신라 진평왕 5년, 고구려 평원왕 25년, 백제 위덕왕 30년, 계묘년(癸卯年), 583년, 중국연호 진나라 후주(後主) 지덕(至德) 원년

봄 정월

○신라에서 처음으로 선부서(船府署)에 대감(大監)·제감(弟監) 각 1원(員)을 두었다.

봄 2월

○고구려에서 급하지 않은 업무를 파하고 사자(使者)를 보내어 농상(農桑)을 권장하게 하였다.

신라 진평왕 6년, 고구려 평원왕 26년, 백제 위덕왕 31년, 갑진년(甲辰年), 584년, 중국연호 진나라 후주 지덕 2년

봄 2월

○신라에서 연호를 고치어 건복(建福)이라 하였다.

봄 3월

○신라에서 조부령(調府令) 1원(員)을 두어 공부(貢賦)를 맡아보게 하고, 승부령(乘府令) 1원을 두어 거승(車乘)을 맡아보게 하였다.

○고구려에서 사신을 보내어 수(隋)나라에 조빙하니, 수주(隋主)가 대흥전(大興殿)에서 사자(使者)를 연회하였다.

겨울 11월

○백제에서 사신을 보내어 진(陳)나라에 조빙하였다.

신라 진평왕 7년, 고구려 평원왕 27년, 백제 위덕왕 32년, 을사년(乙巳年), 585년, 중국연호 진나라 후주 지덕 3년

봄 3월

○신라에 가뭄이 드니 왕이 정전(正殿)을 피하고 감선(減膳)하였으며, 남당(南堂)에 나아가 친히 녹수(錄囚 ;죄인에 대하여 그 죄상·신분·성명·처결 상황을 살피는 것)하였다.

○신라에서 삼궁(三宮)에 사신(私臣)을 두어 대아찬(大阿飡) 화문(和文)을 대궁 사신(大宮私臣)으로 삼고, 아찬(阿飡) 수힐(首肹)을 양궁 사신(梁宮私臣)으로 삼고, 이찬(伊飡) 노지(弩知)를 사량궁 사신(沙梁宮私臣)으로 삼았다.

신라 진평왕 8년, 고구려 평원왕 28년, 백제 위덕왕 33년, 병오년(丙午年), 586년, 중국연호 진나라 후주 지덕 4년

봄 정월

○신라에서 예부령(禮部令) 2원(員)을 두었는데, 직위가 병부령(兵部令)과 같았다.

○고구려에서 도읍을 장안성(長安城)으로 옮겼다.

신라 진평왕 11년, 고구려 평원왕 31년, 백제 위덕왕 36년, 기유년(己酉年), 589년, 중국연호 진나라 후주 정명(禎明) 3년

가을 7월

○신라에서 나라 서쪽에 홍수가 져서 표몰(漂沒)된 인호(人戶)가 3만 3백 60호이고, 죽은 자가 2백여 인이었는데, 왕이 사자를 보내어 진휼(賑恤)하게 하였다.

○신라에서 대사(大舍) 2인과 제감(弟監) 2인을 두었다.

○수(隋)나라가 이미 진(陳)나라를 평정하였는데, 전함(戰艦) 1척이 표류하여 탐모라국(耽牟羅國, 제주도)에 이르렀다가 장차 돌아가는 길에 백제를 지나게 되었다. 왕이 물자를 보내기를 매우 후하게 하고, 이어서 사신을 보내어 표문(表文)을 받들고 진나라를 평정한 것을 하례하니, 수주(隋主)가 이를 좋게 여기고 조서(詔書)를 내려 이르기를, “백제왕이 이미 진나라를 평정한 것을 듣고 멀리서 표문을 받들어 오게 했으니, 왕복(往復)이 지극히 곤란하여 만약 풍랑을 만나면 

문득 손상을 입게 될 것이다. 백제왕의 마음씀이 지극히 순수한 것을 짐이 이미 자세히 알고 있다. 서로의 거리가 비록 멀다 하더라도 일은 면전에서 말하는 것과 같으니, 하필이면 자주 사신을 보내어 와서 서로가 직접 확인해야 하겠는가? 이제부터는 해마다 별도로 공물을 들여보낼 필요가 없고, 나도 또한 사신을 보내지 않을 것이니, 왕은 의당 이를 알라.” 하였다.

신라 진평왕 12년, 고구려 평원왕 32년 · 영양왕 원년, 백제 위덕왕 37년, 경술년(庚戌年), 590년, 중국연호 수(隋)나라 문제(文帝) 개황(開皇) 10년

○고구려왕이 진(陳)나라가 망하였다는 것을 듣고 크게 두려워하여 병기를 수리하고 양곡을 비축하여 막아 지킬 계책을 하니, 수주(隋主)가 왕에게 새서(璽書)를 내려 꾸짖기를, “짐이 천명(天命)을 받아 온 천하를 사랑해 보육(保育)하면서 왕에게 바다의 한 모퉁이를 위임하여 조정의 교화를 선양(宣揚)하게 하였다. 왕이 매양 사인(使人)을 보내어 해마다 조공(朝貢)하는 것이 비록 번부(藩附)라 칭하나, 성의와 절차가 미진하였다. 왕의 한 지방이 비록 땅은 좁고 사람은 적으나, 지금 만약 왕을 내친다면 비워둘 수 없으니, 끝내는 모름지기 관속(官屬)을 뽑아서 그곳으로 나가 안무(安撫)하게 하여야 할 것이다. 왕이 만약 마음을 깨끗이 하고 행실을 바꾸어 헌장(憲章)을 따른다면 곧 이는 짐의 양신(良臣)이니, 어찌 수고롭게 별도로 재주 있는 선비를 보내겠는가? 왕은 요수(遼水)가 넓다고 하겠지만 어찌 장강(長江)만 하겠는가? 고구려의 사람이 많다 하나 진국(陳國)보다는 적다. 짐이 만약 함육(含育)하는 마음을 가지지 않고 왕의 그전 허물을 꾸짖는다면 한 사람의 장군에게 명하면 되지 어찌 많은 힘을 기다리겠는가? 은근히 깨우쳐 줌은 왕이 스스로 새로워지기를 허락할 뿐이다.” 하였다. 왕이 글을 받아보고 황공하여 장차 표문을 받들어 사죄하려 하였으나, 성과를 이루지 못하였다.

겨울 10월

○고구려왕 양성(陽成)이 훙(薨)하니, 호(號)를 평원(平原)이라 하였으며, 태자 원(元)이 왕위에 즉위하였다.

○고구려에서 신라를 쳤으나 이기지 못하고 그 장수 온달(溫達)이 군사에게 죽었다. 처음에 온달이 용모가 파리하고 집이 몹시 가난하여 항상 밥을 빌어다 어미를 봉양하였다. 떨어진 옷과 낡은 신발을 신고 시정(市井) 사이에 왕래하니, 그 당시 사람들이 지목하기를 ‘바보 온달’이라고 하였다. 평원왕(平原王)에게 어린 딸이 있었는데, 울기를 좋아하므로 왕이 항상 희롱하여 말하기를, “너는 늘 울기만 하여 나의 귀를 시끄럽게 하니, 커서도 반드시 사대부(士大夫)의 아내가 될 수 없을 것이니, 마땅히 바보 온달에게나 시집보내야겠다.” 고 하였다. 딸의 나이 16세가 되자 

장차 상부(上部)의 고씨(高氏)에게 시집보내려고 하니, 딸이 말하기를, “왕이란 희롱하여 말할 수 없습니다. 왕께서 항상 저를 온달의 아내로 삼겠다고 말씀하셨는데, 이제 무슨 까닭으로 전의 말씀을 고치려 하십니까? 필부(匹夫)도 오히려 식언(食言)을 하지 않는 법인데, 더구나 지존(至尊)이겠습니까? 왕의 명령이 잘못되었으므로 소녀는 감히 받들 수 없습니다.” 하므로, 왕이 노(怒)하여 말하기를, “나의 가르침을 따르지 않는다면 내 딸이라 할 수 없으니, 의당 네 갈 데로 가라.” 하였다. 이에 (공주가) 값비싼 팔찌[報釧] 수 십개를 팔꿈치에 매단 뒤에 궁궐을 나와 물어가며 온달의 집에 이르르니, 그 어미는 맹인(盲人)에 또 늙은이었다. 온달이 있는 곳을 물으니, 그 어미가 말하기를, “그대의 냄새를 맡으니 향기가 보통 사람과 다르고 그대의 손을 만지니 부드럽기 솜과 같으니 필시 귀인(貴人)이요. 내 자식은 가난하고 누추하여 가까이할 바가 못되오. 내 자식은 굶주림이 극심하여 산으로 느릅나무 껍질을 벗기러 갔오.” 하였다. 공주가 걸어서 산밑에 이르러 온달이 느릅나무 껍질을 지고 오는 것을 보고 그와 더불어 말하니, 온달이 왈칵 성을 내며 말하기를, “이곳은 어린 여자가 이를 곳이 못되니, 반드시 여우가 호리는 것이다. 나에게 다가오지 말라.” 하고, 드디어 돌아보지도 않고 갔다. 공주가 따라와 문밖에서 자고 이튿날 아침에 다시 들어가서 모자(母子)에게 여러 가지로 이야기하였으나 온달이 머뭇거리며 결정을 짓지 못하자, 그 어미가 말하기를, “내 자식은 지극히 누추하여 귀인의 배필(配匹)이 될 수 없고, 내 집은 지극히 가난하여 귀인이 거처할 곳이 못되오.” 하니, 공주가 말하기를, “진실로 마음을 같이 한다면 어찌 부귀만을 구하겠습니까?” 하고, 이에 금팔찌를 팔아 전택(田宅)·노비(奴婢)·우마(牛馬)·기물(器物)을 사니 용품이 완전히 갖추어졌다. 말을 사려고 하매 공주가 온달에게 말하기를, “아예 시장 사람의 말을 사지 말고 모름지기 국마(國馬)로서 병들고 여위어서 버리는 것을 골라오십시오.” 하니, 온달이 그 말과 같이 하였다. 공주가 말 기르기를 몹시 부지런히 하여 말이 날로 살찌고 건장해졌다. 나라 풍속에 항상3월 3일이면 낙랑(樂浪) 언덕에 모여 사냥하여 잡은 짐승으로 하늘과 산천신(山川神)에게 제사를 지내는데, 그날이 되면 왕이 나가 사냥하고 여러 신하와 5부(五部)의 병사(兵士)가 모두 따라간다. 온달도 기른 말을 타고 따라갔는데 늘 앞서 달려갔고 짐승을 잡은 것도 또한 많으니, 왕이 불러 성명을 묻고 놀라며 이상하게 여겼다.

이때 후주(後周)의 무제(武帝)가 군사를 내어 요동(遼東)을 치니, 왕이 군사를 거느리고 예산(隸山)의 들판에서 맞아 싸우는데 온달이 선봉(先鋒)이 되어 수십여 급(級)을 베니 여러 군사가 승세(勝勢)를 타고 분격(奮擊)하여 크게 이겼으며, 공을 논함에 있어 온달이 제일이 되었다. 왕이 가탄(嘉歎)하여 이르기를, “내 사위로다.” 하고, 예를 갖추어 맞이하여 벼슬을 내려 대형(大兄)으로 삼았으니, 총애와 영광이 우악(優渥)하고 권세가 날로 성대하였다. 이에 이르러 태자 원(元)이 왕위를 이어받자 온달이 고하기를, “신라가 우리 한북(漢北)의 땅을 차지하여 군현(郡縣)을 만드니, 한북의 백성은 일찍이 부모의 나라를 잊은 적이 없습니다. 원컨대 대왕께서는 어리석은 것을 불초하다 여기지 마시고 군사를 주시면 가서 반드시 이를 회복하겠습니다.” 하니, 왕이 이를 허락하였다. 떠나기에 임하여 맹세하기를, “계립현(鷄立峴)과 죽령(竹嶺)의 서쪽을 우리에게로 귀속시키지 못할 바에야 돌아오지 않겠다.” 하고, 드디어 행군하여 신라의 군사와 아단성(阿旦城) 아래에서 싸우다가 날아온 화살에 맞아 전사하였다. 장사지내려고 하나 영구(靈柩)가 움직이지 않으므로, 그의 처(妻)가 와서 관(棺)을 어루만지면서 말하기를, “죽고 사는 것이 결판났으니, 아! 돌아갑시다.” 하니, 드디어 관이 들려서 장사를 지냈다. 왕이 이를 듣고 비통해 하였다.

신라 진평왕 13년, 고구려 영양왕 2년, 백제 위덕왕 38년, 신해년(辛亥年), 591년, 중국연호 수나라 문제 개황 11년

봄 정월

○수(隋)나라에서 사신을 보내어 고구려왕을 책봉하여 상개부의동삼사(上開府儀同三司)로 삼고 요동군공(遼東郡公)을 습작(襲爵)하게 하였으며, 옷 한 벌을 주었다. 고구려왕이 표문을 받들어 사례하고 인하여 왕을 봉하기를 청하였다.

봄 3월

○수나라에서 고구려왕을 책봉하고, 인하여 거복(車服)을 주었다.

여름 5월

○고구려에서 사신을 보내어 수나라에 가서 사은(謝恩)하였다.

신라 진평왕 15년, 고구려 영양왕 4년, 백제 위덕왕 40년, 계축년(癸丑年), 593년, 중국연호 수나라 문제 개황 13년

가을 7월

○신라에서 명활성(明活城)을 다시 쌓았는데 둘레가 3천 보(步)이고, 또 서형산성(西兄山城)을 쌓았는데 둘레가 2천 보였다.

신라 진평왕 16년, 고구려 영양왕 5년, 백제 위덕왕 41년, 갑인년(甲寅年), 594년, 중국연호 수나라 문제 개황 14년

○수나라에서 신라왕을 책봉하여 상개부 낙랑군공 신라왕(上開府樂浪郡公新羅王)으로 삼았다.

신라 진평왕 20년, 고구려 영양왕 9년, 백제 위덕왕 45년 · 혜왕 원년, 무오년(戊午年), 598년, 중국연호 수나라 문제 개황 18년

○고구려왕이 말갈(靺鞨)의 무리 만여명을 거느려 요서(遼西)를 침략하니, 영주 총관(營州摠管) 위충(韋沖)이 공격하여 패주(敗走)시켰다. 수주(隋主)가 이를 듣고 크게 노하여 한왕(漢王) 양(諒)과 왕세적(王世績)에게 명하여 아울러 원수(元帥)로 삼고 수륙군(水陸軍) 30만 명을 거느리고 와서 치게 하였다.

여름 6월

○제(帝)가 조서(詔書)를 내려 왕의 관작(官爵)을 삭출(削黜)시켰다. 한왕 양의 군사가 임유관(臨渝關)으로 나가는데 장마를 만나 군량 운반이 이어지지 않자 군중(軍中)에는 먹을 것이 떨어지고 다시 역질(疫疾)에 걸리었다. 주나후(周羅睺)는 동래(東萊)로부터 바다를 건너 평양성(平壤城)으로 향하다가 또한 바람을 만나 선박이 많이 표몰(漂沒)되었다.

가을 9월

○군사가 돌아왔는데, 죽은 자가 십중 팔구(十中八九)였다. 고구려왕도 또한 두려워하여 사신을 보내어 사죄(謝罪)하며 표문(表文)을 올려 ‘요동 분토신(遼東糞土臣) 원(元)’이라고 칭하니, 이에 제가 군사를 파하고 처음과 같이 대우하였다.

○백제왕이 수나라에 요동의 전역(戰役)이 있다는 것을 듣고는 장사(長史) 왕변나(王辯那)를 보내어 표문을 받들고 향도(鄕導)가 되기를 청하니, 수나라에서 조서를 내리기를, “지난해에 고구려가 직공(職貢)을 바치지 않고 인신(人臣)의 예가 없기 때문에 장차 토벌(討伐)하려고 명하였으나, 이제 고구려 원(元)의 군신(君臣)이 두려워하여 복종하며 죄를 자신들에게 돌리고 있으므로, 짐이 이미 그를 용서하였으니, 토벌할 수 없다.” 하고, 그 사신을 후히 대접하여 돌려보냈다. 고구려왕은 이를 유감으로 여기어 누차 군사로 백제를 침략하였다.

겨울 12월

○백제왕 창(昌)이 훙(薨)하니 시호를 위덕(威德)이라 하였으며, 제2자(第二子) 계명(季明)이 왕위에 즉위하였다.

신라 진평왕 21년, 고구려 영양왕 10년, 백제 혜왕 2년 · 법왕 원년, 기미년(己未年), 599년, 중국연호 수나라 문제 개황 19년

○백제왕 계명(季明)이 훙(薨)하니, 시호를 혜(惠)라 하였다. 장자(長子) 선(宣)이 왕위에 즉위하였는데, 영(令)을 내려 살생(殺生)을 금하고 

민가(民家)에서 기르는 매[鷹鷂]를 거두어 놓아주게 하였으며, 또 고기잡고 사냥하는 도구를 불태웠다.

신라 진평왕 22년, 고구려 영양왕 11년, 백제 법왕 2년 · 무왕 원년, 경신년(庚申年), 600년, 중국연호 수나라 문제 개황 20년

○고구려에서 태학 박사(太學博士) 이문진(李文眞)에게 명하여 국사(國史)를 닦게 하였다. 처음에 《유기(留記)》라 이름한 백권의 기사(記事)가 있었는데, 이때에 이르러 그를 수정해 요약하여 《신집(新集)》 5권으로 만들었다.

○백제에서 왕흥사(王興寺)를 창건하니, 도승(度僧)이 30인이었다.

○백제에 큰 가뭄이 들자, 왕이 칠악사(漆岳寺)에 거둥하여 기우제(祈雨祭)를 지냈다.

여름 5월

○백제왕 선(宣)이 훙(薨)하니 시호를 법(法)이라 하였으며, 아들 장(璋)이 왕위에 즉위하였다.

[권근(權近)이 이르기를,]

“불가(佛家)에서 죄와 복을 연관시키는 말로써 어리석은 백성을 속여 유혹시키되, 불법을 숭배해 믿으면 보답해 감응하는 것이 어긋나지 않아서 살았을 때에는 행복과 수명을 더해 주고 죽어서도 이로움을 받는다고 하니, 이것은 오랫동안 세상 사람들을 유혹해 온 소이이다. 백제왕 선(宣)은 그의 아비인 계명(季明)이 일찍 죽은 것을 보고서 ‘진실로 부처를 숭봉(崇奉)하면 수명을 얻게 된다’.고 이르며 즉위하던 처음에 영을 내려 백성에게 매 기르는 것을 금하고 또 민가(民家)의 그물과 고기잡고 사냥하는 도구를 거두어 불태웠고, 그가 병에 걸리게 되어서는 친히 불사(佛寺)에 나아가 불법을 청강(聽講)하였으며, 또 도첩(度牒)을 받아 중이 된 이가 많았으니, 대개 이러한 것으로써 수명을 얻고 복을 누려 보려고 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마침내 효과가 없이 재위(在位)한 지 겨우 1년만에 죽었으니, 그 이른바 보답하여 감응한다는 것이 과연 어디에 있다 하겠는가? 옛날 삼대(三代, 하(夏)·은(殷)·주(周)의 세 왕조(王朝))의 성왕(聖王)이 오랜 수명을 누린 것은 덕을 닦았을 뿐이요 복을 구했던 것은 아니다. 때문에 당(唐)나라 때 한유(韓愈)가 이르기를, 「불법(佛法)이 중국에 들어오기 전에는 수명이 길고 천하가 잘 다스려져 태평했는데, 한·위(漢魏) 이후로 부처를 섬겨 더욱 삼갔으나 연대(年代)가 더욱 짧아졌으니, 부처가 족히 믿을 것이 못됨이 분명하다.」 하였으니, 진실로 확고한 논리이다. 지금 선이 부처를 섬기는 것이 부지런하여 죽은 뒤

시호를 법왕(法王)이라 하였으나, 살아서 이미 능히 수명을 늘리지 못하였으면 죽어서도 또한 유익함을 받지 못할 것이 분명하다. 뒤에 부처에 현혹되는 자가 이를 보면 또한 그 망령됨을 알 것이다.” 하였다. 신라의 중 원광(圓光)이 일찍이 진(陳)나라에 들어가 불법(佛法)을 구하였다. 이에 이르러 내마(奈麻) 제문(諸文)과 대사(大舍) 횡천(橫川)을 따라 수(隋)나라로부터 돌아오니, 그 당시 사람의 중히 여기는 바가 되었다. 사량부(沙梁部) 사람 귀산(貴山)이 추항(箒項)과 더불어 친하였는데, 서로 이르기를, “우리가 사군자(士君子)와 더불어 교유(交遊)하기를 기약하면서 마음을 바르게 하고 몸을 닦지 않으면 아마도 모욕을 자초하는 일을 면하지 못할 듯하다. 어찌 현자(賢者)에게 도를 듣지 않겠는가?” 하고, 곧 원광에게 나아가 말하기를, “속사(俗士)가 몽매하여 아는 것이 없으니, 원컨대 한말씀 하셔서 일평생 훈계를 삼게 하소서.” 하니, 원광이 말하기를, “불계(佛戒)에 있는 보살계(菩薩戒)가 있어 그 구별이 열 가지가 있으나, 그대들은 남의 신자(臣子)가 되어 아마도 능히 행하지 못할 듯하다. 이제 세속(世俗)에 5계(五戒)가 있으니, 첫째는 충성으로써 임금을 섬기는 것이요, 둘째는 효로써 부모를 섬기는 것이며, 셋째는 신의로써 친구와 사귀는 것이요, 넷째는 싸움에 임하여 물러서지 않는 것이며, 다섯째는 살상(殺傷)함에 선택이 있는 것이다. 그대들은 이를 행하는데 소홀함이 없게 하라.” 하였다. 귀산 등이 말하기를, “삼가 가르침을 받아 감히 실추(失墜)됨이 없게 하겠습니다.” 하였다.

신라 진평왕 24년, 고구려 영양왕 13년, 백제 무왕 3년, 임술년(壬戌年), 602년, 중국연호 수나라 문제 인수(仁壽) 2년

○신라에서 대내마(大奈麻) 상군(上軍)을 보내어 수나라에 조빙(朝聘)하였다.

가을 8월

○백제에서 신라를 침공하였으나 대패하고, 신라의 소감(少監)인 귀산(貴山)과 추항(箒項)이 죽었다. 처음에 백제왕이 군사를 내어 신라의 아막산성(阿莫山城)을 포위하니, 신라에서 날랜 기병(騎兵) 수천을 보내어 항거해 싸우자 백제왕이 불리하여 돌아왔다. 신라에서 소타(小陀)·외석(畏石)·천산(泉山)·옹잠(甕岑) 4성(城)을 쌓아 핍박하니, 백제왕이 노하여 좌평(佐平)인 해수(解讎)로 하여금 보병과 기병 4만을 거느리고 4성을 공격하게 하였다. 신라왕이 장군 건품(乾品)·무은(武殷)으로 하여금 

많은 군사를 거느리고 맞아 싸우게 하니, 귀산과 추항도 또한 함께 나아갔다. 해수가 불리하자 군사를 이끌고 후퇴하여 천산(泉山) 서쪽 대택(大澤) 가운데 복병하고 기다렸다. 무은이 갑옷으로 무장한 기병(騎兵) 1천 명을 거느리고 승승 장구(乘勝長驅)하여 대택에 이르자 복병이 일어나 다급하게 공격하니, 무은은 말에서 떨어지고 사졸(士卒)들은 놀라 어찌할 바를 몰랐다. 귀산이 큰소리로 말하기를, “내가 일찍이 스승에게 들으니, 「싸움에 임하여 물러서지 말라.」고 하였으니, 어찌 감히 도망쳐 숨어서 스승의 가르침을 실추시키겠는가?” 하고, 곧 말을 그 아비인 무은에게 주고 곧 추항과 더불어 힘을 다해 싸워서 수 십 인을 해치니, 여러 군사도 그로 인하여 분격(奮擊)하게 되었다. 백제가 패하여 죽어 넘어진 시체가 들에 가득하였는데, 해수는 겨우 자신만을 모면하였다. 귀산과 추항이 온몸에 금창(金瘡)이 나서 죽으니, 왕과 여러 신하가 아나(阿那)의 들판에서 맞이하여 시체에 임하여 통곡하고, 예로써 장사지냈다. 귀산에게는 내마(奈麻)를, 추항에게는 대사(大舍)를 추증(追贈)하였다.

신라 진평왕 25년, 고구려 영양왕 14년, 백제 무왕 4년, 계해년(癸亥年), 603년, 중국연호 수나라 문제 인수 3년

가을 8월

○고구려에서 장군 고승(高勝)을 보내어 신라의 북한산성(北漢山城)을 공격하였는데, 신라왕이 친히 군사 1만을 거느리고 한수(漢水)를 지나자 성중(城中)에서 북을 치고 떠들면서 서로 호응하니, 고승이 중과부적(衆寡不敵)이라 하여 곧 물러났다.

신라 진평왕 26년, 고구려 영양왕 15년, 백제 무왕 5년, 갑자년(甲子年), 604년, 중국연호 수나라 문제 인수 4년

가을 7월

○신라에서 사신을 보내어 수(隋)나라에 조빙하였다.

(네이버 지식백과, 국역 동국통감, 1996, 세종대왕기념사업회에서 인용)

[출처] 동국통감 23|작성자 jaseoda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