東으로 온 월지족

2023. 3. 20. 16:12History of Korea/신라,백제,고구려,고려

월지(6) 東으로 온 월지족

그렇다면 감숙성 알타이산이 근거지인 월지족이 왜 중국의 북동쪽 河北지역에 있었나? 하는 궁금증이 생긴다.

고대 중국인들이 오랑캐라고 부른 이민족에 대하여 알아 보아야 한다.

중국인들은 중국땅으로 부터 사방에 있는 오랑캐를 東夷, 西戎, 南蠻, 北狄이라 불렀는데 서쪽 오랑캐인 서융과 북적을 합쳐 융적이라고도 하였다. 지금의 중국의 북서부 간쑤. 산시성 일대에는 예로부터 융적이라 불리는 유목민족이 살았다. 주나라시기 이후로 산서성과 하북성을 남북으로 하고 서쪽의 고원지대와 동쪽의 태행산맥 서북쪽에는 이들 융적의 활동이 강성하였다. 서쪽에서 온 유목민인 서융이 중국 하북지역으로 이동하여 활동하자 이를 융적이라 한 것으로 보인다.

 

서융에 대한 사서의 기록을 보면

 

 “서융의 성질은 용감하고 사납고 이익에 민감하며 마을(성)에서도 살고 들에서도 산다. 미곡과 양식은 부족하고 금과 패물은 많으며 사람들은 용감하게 싸우기 때문에 이들을 쉽게 격파할 수 없다. 사막의 서쪽에 있으므로 여러 오랑캐종족이 많으며 땅은 넓고 형상이 험준해 그들은 힘을 믿고 저항해 쉽게 머리를 숙이지 않는다.” (제갈양집, 서융편)

 

서융이 유목민을 말하는 있는 것에는 틀림없다. 서융이라고 불린 유목민들은 전국시대부터 만리장성을 중심으로 기원전 4세기에 중국의 동쪽으로 확산되어 연나라까지 이어졌다.

연나라 왕족들이 남긴 신장터우무덤에서 고깔모자를 한 사람의 황금유물이 나왔다.

이와 함께 한반도 세형동검문화에서 쓰이는 꺽창도 함께 출토된 것으로 보아 연나라와 고조선사람들이 연관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조금 더 서쪽의 감숙성 「마자위안」에서 고깔모자를 쓴 인물상이 황금유물, 마차, 유리병등과 함께 발견되었다.

정리하면 《삼국지》에 진한사회를 묘사하면서 기술된 行酒 行觴, 徒에서 보여지는 이민족상인들의 풍습이 위만의 출신지라고 한 魏, 晉이 있던 곳 산시성(山西省)에서 찾아진다.

 

산시성은 위.진이 있기 이전부터 융적이 살고있던 지역이며 진나라시기에는 동서교역의 중심지로 상업이 성행하여 晉商이라 불리는 상인들이 있었다. 또한 이 진상을 가리켜 “참새가 날아 다닐 수 있는 지역이면 어디든지 산시상인이 있다“한 것과 소그드상인을 가리켜 “이익을 남기는 곳이면 가지않는 곳이 없다”고 한 것이 같은 사람들, 월지족을 가리키고 있지는 않을까?

 

여기서 우리는 《삼국지》 【위서 동이전】에

“진한은 옛날 진국이다. (辰韓者古之辰國也) ”라고 한 기록을 떠올리게 되는데 사실 진한이 秦나라의 사역을 피해온 유민이라 辰한이라 했다고 하면서 秦(진)과 한자가 다른 辰國(진국), 辰王(진앙)을 운운하는 기록이 이상하다는 생각을 했는데 이제야 그 궁금증이 풀리는 느낌이다.

 

진한(辰韓)의 진국(辰國)은 옛날 위나라와 진나라가 있던 지금의 산서성 즉 진(晉)을 말하는 것이 틀림없다.

중국의 사서에 같은 발음을 서로 다른 한자로 표기한 사례는 허다하다. 이런 일로 인해 역사연구자들을 혼란에 빠뜨리는 경우도 또한 많다.

 

또한 산시성의 언어가 북방의 방언과는 다른 晉語(진어)를 사용하고 있다는 점이 그들이 월지족이였다는 신빙성을 더해 준다.

월지족은 기원전 500년경부터 농업국가인 중국의 통치자들을 고객으로 비취를 팔았으며 또 중국의 비단을 서역의 국가들에 파는 중계무역에 종사하였다.

장건의 서역착공 훨씬 이전부터 실크로드를 따라 월지족 사람들은 하서회랑을 건너 중국북방에 거주했음을 알수 있다. 중국의 하북지방에 나타난 이들도 오아시스국가들과 중국을 오가며 중계무역에 종사하는 월지의 상인들이었으리라. 교역량이 늘고 거래가 활발해지자 거점지역에 집단거주지가 필요하였을 것이다. 이들은 중국북방에 진출하면서 연과 진의 이민족 집단취락지 방(坊)에서 집단거주하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 북유럽신화의 여전사 프레야, 발키리의 성을 폴크방이라함

7) 한반도로 연결된 실크로드, 이 길로 박혁거세가 왔다.

쿠샨왕조

2017년 경산 하양에서 비교적 규모가 큰 목관묘 무덤이 발굴되었다. 여기에서 상태가 아주 좋은 동경이 발견되어 학계의 주목을 끌었다. 동경은 중국에서 건너온 것이기에 이무덤의 주인공은 고조선유민일 것이다라는 것이 학계의 추측이다. 『위략』에 “위만조선의 재상 역계경이 우거왕과 맞지 않아 동쪽 진국(辰國)으로 갔다”라고 하고 『사기』와 『한서』도 “진국은 중국의 한나라와 직접통교하려고 했지만 위만조선이 가로 막아 뜻을 이루지 못했다”고 한 것등으로 보아 진국은 위만조선과 같은 시기에 존재했음을 알수 있다. 적어도 진국의 지배계층은 위만조선 성립시기에 위만과 함께 한반도로 이주하고 이후에 마한지역으로 남하한것으로 추정할수 있다.

《한서》에 기록된 “위만의 무리들이 진번,조선의 오랑캐, 옛 연.제의 망명자들로 구성되었다”고 한 것은 흡사 외인부대를 연상케 하는데 이들중에 월지족 상인무리가 끼어 있었다는 추정은 당시 중국의 북동지역 역사적 정황을 고려하면 무리가 아닐 것이다.

여기에 필자의 상상력을 더한다면 연왕 노관이 漢을 배신하고 흉노로 망명한 뒤에 노관의 무장이었던 위만이 한나라와 관계가 좋았을 리가 없었을 것이다. 따라서 위만조선에 속해있던 월지의 상인들은 한나라는 물론 서역과의 상업활동이 막히게 되자 위만조선을 벗어나 한반도 남부로 이동하게 된다. 이러한 추정은 진국이 한나라와 통교 하려했으나 위만조선이 가로막았다는 사서의 기록이 이를 뒷받침하고 있다.

한반도 남부지역으로 이주한 월지족들은 마한이 지배하는 땅 일부를 할애 받아 선주민세력과 함께 집단취락지를 형성하게 된 것으로 보인다.

 

한반도 남부에 정착한 월지족 집단은 본래 동서무역에 종사하던 상인들이었기에 진한지역 소국의 지배층이 된 그들은 고대 한반도 여타의 국가들과 다르게 이민족에 개방된 지배이데올로기를 갖게 된다. 이로 인해 진한지역은 일찍부터 상업이 발달하고 수많은 서역의 상인들이 한반도를 찾게 된 것이다.

 

마침내 월지족은 중국에서 서쪽으로 오아시스로를 통해 중앙아시아와 로마를 잇는 실크로드를 개척했을 뿐 아니라 그 반대편 동쪽으로도 중국의 북동지역에서 한반도의 남부지역까지 잇는 실크로드를 연장하게 되는 것이다.

이렇게 동쪽으로 연결된 실크로드를 따라 서역의 상인들이 한반도에 들어오게 되는데 이중에 박혁거세가 있었으리라 추정한다. 어쩌면 박혁거세도 오래전 흉노에 쫒겨 중앙아시아로 이주한 월지족의 후예였기에 동족인 진한 6촌의 추대를 받아 신라의 개국시조가 될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해 본다.

 

西로간 월지족은 중앙아시아를 거쳐 인도북부에 쿠샨왕국을 세워 불교를 꽃피우고

東으로 간 월지는 고조선을 거쳐 마침내 불교왕국 신라를 개국하게 된다.

2000년전의 일을 증언해 줄 사람은 없다. 또한 2000년전의 옛일이 원형그대로 전승되어질 수도 없다. 사료가 부족한 우리의 고대사 영역에서 수많은 가설이 생겨나는 이유이기도 하다.

이글은 하나의 가설에 불과하다.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도 처음에는 가설에 지나지 않았다

. 물리학의 이론이 관찰과 발견을 통해서 가설을 증명해 나가듯이 역사의 가설도 기록과 유물의 발견을 통해 언젠가는 진실에 다다르는 날이 반드시 올 것이라 믿는다. (끝)

[출처] 박혁거세, 그는 누구인가? (3)|작성자 자작나무


※주석: 가야 유물에 남겨진 낙타 ㅡ 이외에도 쿠샨왕조의 유물과 같은 유물이 가야와 신라에 많음(따로 자료를 정리하여 동영상으로 만들거예요)

 

낙타각배( 한국역사 학자들은 말이라고 함)와 원봉낙타

 

가야 낙타각배와 낙타

 

가야의 낙타모양 주병 (1,2)

 

가야 기마토기(위)와 큐산 제국의 낙타(아래) 토기

 

꼬깔모를 쓴 북유럽인형 (월지족은 DNA분류로 켈트족)

한반도에도 BC 7000전에 켈트족, 게르만족 거주

출처: 한국인의 조상은 백인? (brunch.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