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의 고대왕조: 하나라

2022. 11. 19. 23:46신화/중국신화,일본신화,동남아신화

중국역사

중국의 고대왕조: 하나라

chinatoktok 2020. 11. 16. 22:46

개요

중국의 문헌에 중국 최초의 왕조 국가로 기록된 나라. 황하문명의 한 갈래이다. 전통적으로 중국 한족을 화하족이라고 부르는데, 이는 바로 이곳의 국명에서 유래된 것이다. 다만 문헌적, 고고학적 근거가 미약해 실존한 나라로 인정받지는 못한다. 중국 역사학계에서는 얼리터우 문화로 대표되는, 문헌 속 하나라 연대에 해당하는 청동기 문화를 하 문화로 부르기도 하나, 이를 지지하는 학자들 중에서도 하 문화의 존재는 인정해도 이것이 국가로까지 발전했는가에 대해서는 이견이 있다. 기록에 따르면 국성은 '사', 씨는 '하후'이다. 

 

건국자는 '우', 상서 등 문헌에 의하면, 요순시대 엄청난 홍수가 일어났는데, 우의 아버지 '곤'이 치수에 실패하여 추방당하고 죽자, 그 뒤를 이은 우가 중국 전토에 이르는 치수 사업을 벌인다. 그후로 이를 성공한 공으로 순 임금에게 선양받아 중국 최초의 왕조인 하나라를 세웠다고 한다. 우의 한자인 禹(성씨 우)라는 글자의 형태는 손으로 뱀을 쥔 형상에서 비롯되었는데, 이는 우 임금이 뱀으로 상징되는 강의 범람이라는 환란을 평정한 영웅으로 여겨졌음이 암시되었다. 

 

상서 및 사기에서는 그의 사후 하나라의 왕위가 우의 아들에게 세습되면서 왕위세습이 제도화되었다고 하는데, 죽서기년에서는 본디 백익에게 선양할 생각이었으나, 우의 아들이 백익을 죽이고 왕위에 올라서 세습이 고착되었다고 하는 이설도 전한다. 

 

마지막 왕인 걸왕은 은나라 주왕과 더불어 하걸은주라고 불리는 고대의 2대 폭군에 들어갈 정도로 엄청난 인간말종이었다. 그는 말희라는 미녀에게 현혹되어 나라를 망치고 은나라 시조 성탕에 의해서 멸망되었다고 한다. 이후 은나라는 달기와 엮여서, 주나라는 포사와 엮여서 멸망했으니까, 연속해서 3대 왕조가 미녀에의해 국가를 망치게 된 셈이다. 사마천은 사기에서 흉노를 하후의 후예라 하면서 하나라와 연관짓고 있지만 후세의 가탁이라 여긴다. 

 

실존한 나라였을까? 

사실 멸망 패턴이 항상 똑같다는 점은 상나라와 하나라의 존재가 주나라의 역사를 토대로 창작된 것이 아니냐는 의심을받는 한 이유가 되었다. 갑골문자의 발견으로 상나라의 실존은 밝혀졌지만 하나라의 실존을 뒷받침할 유적이나 유물은없다. 오히려 갑골문은 하나라의 존재를 부정하는 근거들 중 하나이다. 

 

  • 우선 갑골문에서 탕왕은 상 왕조의 창시자가 아니라 상 왕조를 중흥시킨 왕일뿐이다. 갑골문에 따르면 상 왕조의 시작은 탕왕이 아니라 삼황오제 중 하나인 제곡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 갑골문에서 탕왕을 칭송하는 내용은 많이 보이지만 그중에서 하 왕조나 그에 해당되는 강한 적을 물리쳤다는 언급은 전혀 없는 등 갑골문에서 하 왕조의 흔적은 전혀 찾아볼 수 없다. 더구나 갑골문에서는 '하'라는 글자조차 식별되지 않으며, 갑골문에서의 1년은 춘하추동이 아니라 단순히 춘추로 구별했다. 
  • 국성이 '사'라고 전해지는데, 이 또한 논란이 많다. 최초의 문자로 보여지고 있는 갑골문이나 홍도문들은 상나라 3기인 은허 시기 이후를 중심으로 발굴되고 있다. 그런데 그보다 600여 년이나 빠른 하나라 초기의 인물인 하나라 우의 후손들이 성씨를 '사'라고 사기에서 표현하고 있는 것에 대해서는 의문이 들 수 밖에 없다. 

 

일단 상나라의 존재와 같이 왕계가 전하고 선진 시대의 여러 문헌에서 언급이 되는 왕조라서 실존했을 가능성이 있으나현재까지 확실한 고고학적 증거가 없다. 현재 하나라의 후보지로 뽑히는 곳이 '낙달묘', '이리두' 등의 지역이지만, 정확히문자 자료가 없어 아직 실증은 불가능하다. 

 

현재 중국에서는 하나라를 중원지역에서 좀 잘나가는 조그마한 성읍국가였을 것이라고 보고 있다. 만약 하나라가 실존했던 국가였다면 이러한 추측대로 조그마한 지역을 차지한 성읍 국가였을 가능성이 높다. 추가적으로 일각에서는 요와 순이 실존하고, 이들이 하나라가 건국되기 이전과 후 하나라를 건국하는 집단을 이끌던 일종의 족장으로 보기도 한다. 

 

하나라의 쇠퇴와 멸망 

하의 14대 왕인 공갑은 성격이 음란하고 귀신을 흉내내는 것을 좋아해 인심은 하왕조로부터 멀어져 갔다고 기록되어있다. 또 은 인덕이 부족해 무력으로 제후와 민중을 억압해 인심의 배반을 불렀다. 또 상나라의 탕을 불러내 투옥시켰다. 

 

탕은 덕으로써 나라를 다스려서, 제후들이 그의 밑에 모였으며 마침내 걸을 쫒아냈다. 걸은 명조로 도망쳤지만 객사했다. 이 걸에 관한 전설은 상나라와 주와 지나치게 비슷해서 후세에 만들어진 전설이라는 주장도 있다. 상나라의 탕왕은 제위에 즉위하면서 하나라의 혈통을 받은 사람들을 '하정'에 봉했다. 주나라 때에는 기나라의 제후로 봉해졌다. 

 

그 외 정보 

  • 중국의 춘추전국 시대에 존재했던 기나라가 전해지는 바로는 하나라 '우'의 후예라고 하지만 확인된 바는 없다. 
  • 중국제 잠수함에 대한 NATO 코드명은 대개 중국의 역대 왕조 중에서 이름을 따오고 있는데, 이 왕조명 역시 SSBN샤급의 이름으로 쓰였다. 
  • 산해경과 사마천의 사기(역사책)에서 흉노가 하나라의 후예로 기록했지만 실존성과는 거리가 멀다. 그리스 신화와 성격과 마찬가지로 주변국 역사에 중국 중심의 역사관을 붙여넣은 걸로 보는 견해가 많다. 
  • TYPE-MOON 세계관에서는 고대 신대에 실존했던 왕조이다. 진궁은 하 왕조의 후손이며 하 왕조의 유산은 신대문명 답게 마술회로 같은 신비나 마력을 지닌 자만이 쓸 수 있었다고 한다. 
  • 동방감주전에 등장하는 순호는 하나라의 현처 순호가 모티브다. 
  • 현재 2리 끝에서 1~4기까지는 모두 하나라의 문화로 초기 용산문화, 후기 상업문화와 겹친다고 알려져있다. 이 중 눈에 띄는 대목은 하에서 상으로의 문화적 급변으로 인해 대규모 전쟁으로 비치기 쉽다는 점이다. 일부 전문가들은 이번 전쟁이 하걸의 명조(明條)를 없애는 전쟁이라고 보고 있다. 
  • 이 두리가 하나라의 시작점인지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하다. 얼리두 문화는 초기의 용산문화와 마찬가지로 급변한 것으로, 일부 전문가들은 이것이 전쟁으로 인한 것이며 역사적으로 기록된 대로 후예 대하가 될 것으로 보고있다. 
  • 하나라 문화의 기원에 주목한 것은 왕성강 유적이었는데, 대성의 발견과 시기적응으로 유도양성의 지위를 인정받게 되었다는 점이다. 확실한 결론은 앞으로 몇 년간의 연구성과에 달려있다. 덧붙여 이러한 고고학적 증거와 역사기록에 대한 대응은 여러분을 오도할 수도 있다. 하지만 하나라와 하왕조의 존재 여부는 여전히 확실하지 않고 학술적 근간에 역시 아직 확실하지 않은 부분이 있다고 볼 수 있다. 

 

※ 요임금 

제요 도당씨(帝堯陶唐氏) 중국 신화 속 군주이다. 중국의 삼황오제 신화 가운데 오제의 하나이다. 다음 대의 군주인 순(舜)과 함께 이른바 '요순'(堯舜)이라하여 성군의 대명사로 일컬어진다. 현재까지 요의 역사적 실존성은 정확히 밝혀진바가 없고, 다만 우왕과의 관계에서 하나라 이전에도 국가 비슷한 실체가 형성되 있음을 보여주는 자료로 사용된다.

 

치세 

요는 제곡 고신의 아들로 이름은 방훈(放勳)이고 당요 또는 제요도당으로도 부른다. 이는 요가 당 지방을 다스렸기 때문에 붙은 칭호이다. 요는 '도당씨'라고도 부르는데, 요가 처음에 '도'라는 지역에 살다가 당이라는 지역으로 옮겨 살았기 때문이라고 한다. 

 

<사기>와 여러 역사서의 기록에 따르면, 요는 20살에 왕위에 올라 덕으로 나라를 다스렸다. 요의 치세에는 가족들이 화합하고 백관의 직분에 공명정대하여 모든 제후국들이 화목하였다고 한다. 요는 희씨와 화씨 일족에게 계절의 구분에 따라 농사의 적기를 가르쳐주도록 하였으며, 1년을 366일로 정하고 백관들을 정비하였다. 또한 자신이 독단적인 정치를 할 것을 염려하여 궁전 입구에 감간고(감히 간언드리는 북)를 달아 경계하도록 하였다. 요의 만년에는 황하가 범람하여 큰 홍수가 났으며, 요는 이를 다스리기 위하여 곤을 시켜 9년 동안 치수공사를 하게 했지만, 실패하였다. 

 

요가 왕위에 오른 지 70년 가까이 지난 후 후계자를 찾아 신하들에게 추천할 것을 명하였다. 

 

신하들은 전욱 고양의 후손이자, 효성이 지극한 '순'을 추천하였다. 요는 순에게 두 딸을 시집 보내고 여러가지 일을 맡겨 순의 사람됨과 능력을 시험하였으며, 3년 후 순을 등용하여 천하의 일을 맡겼다. 20년이 지나자 요는 순을 섭정으로 삼고 은거하여 8년 후에 세상을 떠났다. 다만 <죽서기년>에서는 순이 쿠데타를 일으켜 요를 폐위 감금했다고 나온다. 일부 학자들은 요 시대 쯤에 황하유역에 중앙집권적인 정치 세력이 형성되었다고 추정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