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라ㅣ흉노가 하나라의 후손
2022. 11. 19. 19:37ㆍ카테고리 없음
[ 기원전 약 1600 ~ 907 ]
[ 907 ~ 현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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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
夏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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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원전 21세기?~기원전 17세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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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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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하(華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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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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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화베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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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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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姒)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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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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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후(夏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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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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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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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요 군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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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왕(기원전 22/21세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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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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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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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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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립 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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멸망 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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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국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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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편집]
황하 문명의 한 갈래로 중국의 문헌에 최초의 세습 왕조로 기록된 나라이다. 전통적으로 중국 한족을 화하(華夏)족이라고 부르는데, 바로 이 국명과 위치(화산 일대)에서 유래된 것이며 후대 하나라들의 어원이 되었다. 다만 문헌적・고고학적 근거가 미약해 실존한 나라로 인정받지는 못한다. 중국 역사학계에서는 얼리터우 문화로 대표되는, 문헌 속 하나라 연대에 해당하는 청동기 문화를 '하 문화'로 부르기도 하나, 이것을 '문화(culture)'로는 인정해도 국가로까지 발전했는가에 대해서는 이견이 있다.
기록에 따르면 국성은 사(姒), 씨는 하후(夏后)이다. 건국자는 우다. 《상서》 등 문헌에 의하면, 요순시대에 엄청난 홍수가 일어났는데, 우의 아버지 곤이 치수에 실패하여 추방당하고 죽자, 그 뒤를 이은 우가 중국 전토에 이르는[3] 치수 사업을 벌였다. 그리고 이를 성공한 공로로 순 임금에게 선양받아 중국 최초의 세습 왕조인 하나라를 세웠다고 한다. 우의 한자인 '禹'(성씨 우)의 형태는 손으로 뱀을 쥔 형상에서 비롯되었는데, 이는 우임금이 뱀으로 상징되는 강의 범람이라는 환란을 평정한 영웅으로 여겨졌음이 암시된다.
《상서》 및 《사기》에서는 그의 사후 하나라의 왕위가 우의 아들 계에게 세습되면서 왕위 세습이 제도화되었다고 하는데, 《죽서기년》에서는 본디 백익에게 선양할 생각이었으나, 우의 아들 계가 백익을 죽이고 왕위에 올라서 세습이 고착되었다고 하는 이설이 전해진다.
마지막 왕인 걸왕은 상나라의 주왕과 더불어 하걸은주라고 불리는 고대의 2대 폭군에 들어갈 정도로 엄청난 인간 말종이었다. 그는 말희라는 미녀에게 현혹되어 나라를 망치고 상나라의 시조인 성탕에 의해서 멸망되었다고 한다. 이후 상나라는 달기와 엮여서, 주나라는 포사와 엮여서 멸망했으니까, 연속해서 3대 왕조가 미녀에 의해 국가를 망치게 된 셈이다. 수도는 양청현과 짐심을 비롯하여 여러 곳이었고 막판에는 하남이다.
기록에 따르면 국성은 사(姒), 씨는 하후(夏后)이다. 건국자는 우다. 《상서》 등 문헌에 의하면, 요순시대에 엄청난 홍수가 일어났는데, 우의 아버지 곤이 치수에 실패하여 추방당하고 죽자, 그 뒤를 이은 우가 중국 전토에 이르는[3] 치수 사업을 벌였다. 그리고 이를 성공한 공로로 순 임금에게 선양받아 중국 최초의 세습 왕조인 하나라를 세웠다고 한다. 우의 한자인 '禹'(성씨 우)의 형태는 손으로 뱀을 쥔 형상에서 비롯되었는데, 이는 우임금이 뱀으로 상징되는 강의 범람이라는 환란을 평정한 영웅으로 여겨졌음이 암시된다.
《상서》 및 《사기》에서는 그의 사후 하나라의 왕위가 우의 아들 계에게 세습되면서 왕위 세습이 제도화되었다고 하는데, 《죽서기년》에서는 본디 백익에게 선양할 생각이었으나, 우의 아들 계가 백익을 죽이고 왕위에 올라서 세습이 고착되었다고 하는 이설이 전해진다.
마지막 왕인 걸왕은 상나라의 주왕과 더불어 하걸은주라고 불리는 고대의 2대 폭군에 들어갈 정도로 엄청난 인간 말종이었다. 그는 말희라는 미녀에게 현혹되어 나라를 망치고 상나라의 시조인 성탕에 의해서 멸망되었다고 한다. 이후 상나라는 달기와 엮여서, 주나라는 포사와 엮여서 멸망했으니까, 연속해서 3대 왕조가 미녀에 의해 국가를 망치게 된 셈이다. 수도는 양청현과 짐심을 비롯하여 여러 곳이었고 막판에는 하남이다.
2. 실존한 나라였는가?[편집]
고고학과 역사학에서 말하는 문화와 문명은 엄격하게 구분된다. 간단히 말하면 "문화(Culture)"는 석기시대범주의 개념이다. 석기시대 중 특히 신석기시대와 이후 금석병용시기의 원시부락 인류유적을 말할 때 쓴다. 이에 반하여 "문명(Civilization)"은 청동기시대의 범주에 속하는 것이고, 인류가 청동기시대에 진입한 이후의 국가단계를 의미하는 것이다.
사실 문화(Culture)와 문명(Civilization)이 두 개의 영어단어의 어원에서도 우리는 분명히 양자를 구분할 수 있다. 문화의 어근인 Cult-의 원시적인 의미는 "경작"이었고, 이것은 문화라는 개념이 농경과 연결되는 원시부락시대의 범주에 속한다는 것을 알수 있다. 그러나, 문명의 어근인 Civ-의 원시적인 의미는 '시민'이다. 이것은 마찬가지로 문명이라는 개념의 본 뜻이 시민의 출현과 동시에 생성된 도시 및 상공업과 연계되는 청동기시대의 범주에 속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문명은 몇 개의 중요한 특징을 지니고 있다. 문자, 야금술, 도시국가, 종교의식 등등이다. 바로 이것은 상공업과 밀접한 관계를 가진다. 하나의 문명이 시작했는지 여부를 판정하고, 언제 시작했는지를 판정하는 것은 바로 이러한 몇가지 표준을 가지고 보는 것이다. 또한 고고학의 발견에 따라 확정되는 것이지, 신화전설, 민간고사, 야사잡서 또는 "사기(史記)"와 같은 고고연대보다 2천년 이상 이후에 쓰인 "역사기록"으로 판정되는 것이 아니다. 이것은 고고학과 역사학의 상식이다.
중국 학자의 하상주공정 비판 #
멸망 과정이 항상 똑같다는 점은 상나라와 하나라의 존재가 주나라의 역사를 토대로 창작된 것이 아니냐는 의심을 받는 한 이유가 되었다. 이후 갑골문자 분석으로 상나라의 실존은 밝혀졌지만, 하나라의 실존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고, 고고학계에서는 대체로 실존을 부정한다. 하나라의 실존을 주장하는 측에서 존재를 뒷받침하는 근거로 제시하는 것은 하-상 교체기에 해당되는 듯한 유물의 전환 과정이 나타난다는 것, 그리고 탕왕의 존재가 갑골문으로 증명되었다는 것이다. 문제는 그 세부 내용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오히려 그 반대의 근거가 된다는 것. 즉, 갑골문은 하나라가 허구의 나라라는 강력한 근거 중 하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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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골문에서 탕왕을 칭송하는 내용은 많이 보이지만 그중에서 하 왕조나 그에 해당되는 강한 적을 물리쳤다는 언급은 전혀 없는 등 갑골문에서 하 왕조의 흔적은 전혀 찾아볼 수 없다. 그러나 이에 대한 반박으로는 하나라를 무너트린 상나라 입장에서 굳이 하나라를 새길 필요가 있냐는 것이다. 정통성이 문제되는 상황에서 전에 존재했던 왕조를 기록으로 남기는 것은 신생국가로서는 별로 좋은 판단이 아니었을 거라는 추측도 있다.
일단 상나라의 존재와 같이 왕계가 전하고, 선진 시대의 여러 문헌에서 언급이 되는 왕조라서 실존했을 가능성이 있으나, 적어도 현재까지 확실한 고고학적 증거가 아직 발견되지는 않았다.
현재 하나라의 후보지로 꼽히는 곳이 낙달묘(洛達廟), 이리두(二里頭) 등의 지역이지만, 정확한 문자 자료가 없어 아직 실증은 불가능하다. 중국에서는 2000년에 중국 사회과학원이 종료한 하상주단대공정에 의해 얼리터우 문화를 하나라로 비정해서 실존한 국가라고 확정하고 연대를 추산하였지만, 국제 사학계는 이 결과를 인정하지 않는다. 중국 사학계 내에서도 하상주단대공정은 많은 비판과 논란을 받고 있다. 간단히 말하자면, 공정에서 얼리터우 문화의 추산 연대가 문헌상의 하나라의 연대와 비슷하다는 이유만으로 억지로 끼워맞췄다고 본다. 사실 하상주단대공정의 결론은 죄다 이런 식의 비판을 받고 2000년에 약식 보고서라고 할 수 있는 간본을 발간한 이래 2017년까지도 정식 보고서를 발간하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우선, 중국 사회과학원에서는 하나라의 존속 시기는 기원전 2070년부터 기원전 1600년까지라고 주장한다. 다만 전통적으로는 기원전 22세기부터 기원전 18세기까지 존속한 것으로 간주되었다. 세계 학계에서는 많은 비판을 받고 있지만, 2019년 기준으로 한국어판, 영어판 및 일본어판 위키백과에서는 중국 측이 주장하는 하나라의 연대가 병기되어 있다.
3. 도시 국가[편집]
이와 더불어, 하나라의 역사적 실체에 대한 엄밀한 이해가 필요하다. 하를 하나의 역사적 실체로 인정한다 하더라도, 하가 일개 성읍 국가의 명칭에 지나지 않는 것임을 인식할 필요가 있다. 당시 중원에는 하와 본질적으로 동일한 성격의 성읍 국가들이 수없이 공존하고 있었고, 하는 그 수많은 성읍 국가들로 구성된 국제 사회에서 중심된 역할을 수행하는 일개 성읍 국가에 지나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기》의 사마천 등 후대의 중국인 역사가들은 자기 시대의 왕조상을 수천 년 전의 하대에 투사하여 하를 마치 방대한 규모의 영토를 가진 국가인양 묘사했던 것이다.
하를 이와 같은 개념으로 이해할 수밖에 없는 까닭은 하를 이었다는 상, 주 등 중원의 '왕조'들도 진, 한 등과 같은 후대의 왕조와는 달리 수많은 성읍 국가군으로 구성된 중원 국제 사회의 대표적 성읍 국가에 지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 김한규, 《천하국가》, 57쪽
현재 중국 사학계는 실존한다는 가정하에[6], 하나라를 중원 지역에서 좀 잘나가는 종주 성읍국가였을 것이라고 보고 있다. 만약 하나라가 실존했던 국가라면 이러한 추측대로 중원지역의 종주권을 차지한 성읍 국가였을 가능성이 높다.
당시의 중국 대륙은 지금과는 매우 다른 식생을 가지고 있었다. 지금과는 달리 황하와 회하 유역 일대의[7] 대부분의 땅들이 강수량이 많은 아열대 내지 열대성 기후였고, 덕분에 습지가 많은 아열대 밀림이 대부분이었다.
물소는 물론 코끼리, 코뿔소, 곰, 호랑이, 표범, 구름표범을 포함한 각종 맹수들과 전설의 속에 등장하는 용의 모티브가 되었을 물왕도마뱀, 코브라, 버마비단뱀, 양쯔강악어를 비롯한 대형 파충류들하고 붕, 봉황, 주작, 짐의 모티브인 듯한 조류들이 살고 있었던 험악한 열대밀림의 땅이었다는 것.
상고 시절에는 그냥 밀림 문명이 맞았지만 춘추전국시대로 가면서부터 황하 유역 일대는 기후 변화와 수천년 동안의 개간을 통해 밀림이 사라지고 평야로 바뀌었으며, 장강 유역 일대만 밀림이었다가 이내 한나라 이후에 개간되었다. 물론 거기에 서식하고 있었던 동물들 역시 서식지 파괴와 무분별한 사냥으로 사라졌다.
또 당시 개별적인 성읍국가들의 직접적인 통치 영역 바깥에는 완전히 서로 다른 문명들이 존재하였다.
또 당시 개별적인 성읍국가들의 직접적인 통치 영역 바깥에는 완전히 서로 다른 문명들이 존재하였다.
이런 열대밀림 사이에 세워진 '성읍 국가'들은 다양한 문자 문화와 금속 문명을 가지고 있다가 일부 국가는 후대의 중국 문명으로 계승되고 일부는 단절되었다. 당연히 성읍 국가 이외의 지역에는 아예 인간이 살지 않거나 완전히 다른 풍속을 지닌 이민족이 살고 있었다. 심지어 주나라 후기인 동주 시절에도 수도인 낙양 서쪽의 산에 이민족 부락이 있을 정도였고, 현대 중국에도 수많은 소수 민족들이 중국 땅 내부에 존재하는 것을 생각한다면 당시에 얼마나 많은 이민족 성읍국가들이 존재했을지는 명확한 일이다.
이렇게 각기 다른 문명들이 고대 시기(이를테면 춘추전국시대 즈음)를 거치며 서로 교류하거나 정복하는 과정을 거쳤고 최종적으로 한나라때 한족으로써의 정체성을 확정지었다.
이렇게 각기 다른 문명들이 고대 시기(이를테면 춘추전국시대 즈음)를 거치며 서로 교류하거나 정복하는 과정을 거쳤고 최종적으로 한나라때 한족으로써의 정체성을 확정지었다.
이런 사실이 확정된 것은 그리 오랜 시간이 흐르지는 않았지만 어쨌든 이러한 사실들이 밝혀진 이후로는 황하 문명과 장강 문명을 합쳐 중국문명이라는 범칭으로 칭하는 것이 대세이며, 하나라가 실존했다고 가정한다면 황하 문명권에 속한, 중원 지역의 성읍 국가 중 하나로 보는 정도다.
일각에서는 제요 도당씨와 제순 유우씨가 실존하고, 이들이 하나라가 건국되기 이전, 후일 하나라를 건국하는 집단을 이끌던 일종의 족장으로 보기도 한다. 따라서 하 왕조 역시 상 왕조와 함께 존재한 다른 왕조였으며 한때 하 왕조가 우세했다가 이후 상 왕조가 주도권을 가져갔다고 해석한다면 갑골문의 기록과 모순되지는 않는다.
다만 어디까지나 "이렇게 하니까 정황상 말이 되는" 수준일 뿐, 하나라의 존재가 고고학적으로 확정된 것은 아니다.
일각에서는 제요 도당씨와 제순 유우씨가 실존하고, 이들이 하나라가 건국되기 이전, 후일 하나라를 건국하는 집단을 이끌던 일종의 족장으로 보기도 한다. 따라서 하 왕조 역시 상 왕조와 함께 존재한 다른 왕조였으며 한때 하 왕조가 우세했다가 이후 상 왕조가 주도권을 가져갔다고 해석한다면 갑골문의 기록과 모순되지는 않는다.
다만 어디까지나 "이렇게 하니까 정황상 말이 되는" 수준일 뿐, 하나라의 존재가 고고학적으로 확정된 것은 아니다.
4. 역대 국왕[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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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그 외[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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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나라 왕실도 하나라 왕실에서 나왔다고 전해지지만 역시나 확실히는 알 수 없다.
6. 매체[편집]
[1] Area of the Erlitou culture (1900–1500 BC) in northern China, based on Liu Li and Chen Xingcan (2012), The Archaeology of China: From the Late Paleolithic to the Early Bronze Age, Cambridge University Press, ISBN 978-0-521-64310-8, p257.[2] 하나라가 실존하지 않는다면, 상나라가 최초의 국가이다.[3] '중국'은 본래 황하 중하류 지역에 국한하는 영역으로, 현재의 용법으로의 의미확장은 춘추전국시대 종결로 이루어진다.[4] 다만 상나라 문서에는 이에 대한 반박이 있다.[5] 사실 전근대 시대에 각국의 군주들이나 귀족들이 자기들을 전설상의 나라나 신화속 인물의 후예라고 주장하는 일은 매우 흔했다. 당장 한국만 해도 실존 여부가 불분명한 단군을 한국인의 시조로 여기는 풍조가 강하며, 전근대에는 (한국사로서의) 기자조선을 사실이라고 생각했다는 점까지 고려하면 엄청 복잡해지는데, 일본 황실도 제2차 세계 대전에서 패배하기 전까지는 공식적으로 자기들을 일본 신화의 주신인 아마테라스의 후손이라고 자칭한 바 있다. 또, 고대 그리스의 여러 도시국가의 귀족이나 왕족들은 자기들의 조상을 헤라클레스나 포세이돈 등의 그리스 신화의 영웅이나 신이라고 주장했고, 로마 제국의 건국 신화에서는 그 시조인 로물루스와 레무스 형제를 마르스의 아들들이라고 비정하고 있다. 기나라의 경우도 이런 경우로 추정된다.[6] 사실 상술한 대로, 중국 사학계도 주류 학자들은 하나라의 실존 가능성을 그리 높게 보지 않는다.[7] 당시에는 중화문명권으로 보기 어려웠던 장강 유역 일대까지 포함할지라도[8] 주나라와 상나라의 관계만 보더라도, 주왕 이전에 이미 주나라가 상나라와 병존하고 있었다. 그리고 주왕의 몰락 이후에도, 송나라으로 이름이 바뀌고 패권을 빼앗겼을 뿐 상의 세력은 주와 병존했다.[9] 하나라가 기원전 1600년에 멸망했다고 볼 경우 기원전 2045년 ~ 기원전 2090년이다.[10] 우왕의 신하로, 우가 죽은 뒤 왕위를 물려받았다. 우의 3년상이 끝나자 우의 아들 계에게 왕위를 양위하고 기산(基山)으로 물러나 살았다. 상고 8대성의 하나인 영성(嬴姓)의 시조로 전국 7웅의 진나라, 조나라가 이 사람의 후손을 자처했다. 전승에 따라 소호 금천씨, 또는 전욱 고양씨의 후손이라고 한다.[11] 무주 성신황제 추존.[12]
그리스 로마 신화 - 나무위키
그리스 로마 신화라고 하지만 우리가 읽는 것은 사실상 거의 '그리스 신화'다. 로마인들은 자기네 전통 신들을 거의 대부분 그리스 신들과 동일시했기 때문에, 로마 신화는 덤으로 다룰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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