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 혁거세왕(朴 赫居世王) 신화
서기전 69∼서기 4(혁거세거서간 61). 신라의 건국시조. 재위 서기전 57∼서기 4. 신라 박씨(朴氏)의 시조이다. 『삼국유사』'신라시조 혁거세왕'조에 제1대 박혁거세(朴赫居世)왕의 칭호는 거슬감(居瑟邯) 또는 거서간(居西干)이었는데, 이 칭호는 알지거서간(閼智居西干)에서 유래되었다라는 기록이 있다. 일명 불구내(弗矩內)라고도 한다. 이 이름들은 신라 초기에 사용된, 왕의 칭호다. 일반적으로 박혁거세로 지칭한다.
전한(前漢) 지절(地節) 원년(元年) 임자(壬子) 3월 초하루에 육부의 조상들이 각각 젊은이들을 거느리고 알천 언덕 위에 모여서 의논하기를, "우리들에게는 위로 뭇 백성들을 다스리는 임금이 없으므로 백성이 모두 방종하여 제멋대로 행동하니 덕이 있는 분을 찾아 내 임금으로 삼아서 나라도 세우고 도읍을 차려야 할 것이 아니냐?"
라고 하였다.
이에 그들은 높은 곳에 올라가서 남쪽을 바라보니 양산(楊山) 아래 나정(蘿井) 옆에 번갯빛 같은 이상한 기운이 땅으로 드리웠는데, 흰 말 한 마리가 꿇어앉아서 절하는 형상을 하고 있었다. 곧 뒤져 보니 자줏빛 나는 알 한 개가 있고 말은 사람을 보자 길게 소리를 뽑아 울면서 하늘로 올라갔다. 그 알을 쪼개 보니 사내아이가 있는데, 모습이 단정하고 아름다웠다. 놀랍고 이상해서 동천(東泉)에서 목욕을 시키었더니, 몸에서 광채가 나고 새와 짐승들이 모두 춤을 추며 천지가 진동하고 해와 달이 청명하였다.
그리하여 그 아이를 혁거세왕(赫居世王)이라고 이름을 짓고 직위의 칭호로는 거슬감(居瑟邯)이라고 했다. 그 당시의 사람들이 다투어 가면서 치하하기를 "이제 천자(天子)가 내려오셨으니 곧 마땅히 덕이 있는 황후를 찾아 내어 배필을 정해야 하겠다."고 하였다.
이 날 사량리 알영 우물에서 계룡(鷄龍)이 나타나더니 왼쪽 옆구리로 계집아이를 낳았다. 얼굴이 아주 고우나 입술이 마치 닭의 주둥이와 같았는데, 월성(月城) 뒷내물에 데리고 가서 목욕을 시켰더니 그 주둥이가 뽑혀져서 떨어졌다. 그래서 그 내를 발천(撥川)이라고 부른다.
남산 서쪽 기슭에 궁실(宮室)을 짓고 거룩한 두 아이를 받들어 길렀다. 사내는 알로 나왔으니 알은 박[瓠]과 같았는데 우리 나라 사람들이 박을 '박(朴)'이라고 하기 때문에 성을 박씨라고 하였으며, 여자는 자기가 난 우물 이름으로 이름을 지었다. 두 성인의 나이 13세에 이르러 오봉(五鳳) 원년(元年) 갑자(甲子)에 사내가 임금이 되면서 여자를 왕후로 삼았다. 나라 이름은 서라벌(徐羅伐) 또는 서벌(徐伐)이라고 하고 혹은 사라(斯羅) 또는 사로(斯盧)라고도 이른다. 또, 맨 처음 왕이 계정에서 난 까닭에 계림국(鷄林國)이라고도 하니 계룡이 상서를 나타내기 때문이다. 달리 말하기를 탈해왕 때 김알지를 얻었는데, 그 때 닭이 숲 속에서 울었다 해서 나라 이름을 계림이라고 고치었다가 후세에 와서 드디어 신라란 칭호로 정하였다고 한다.
나라를 다스린 지 61년 만에 왕이 하늘로 올라가더니 이레 후에야 유해가 흩어져서 땅 위로 떨어졌다. 왕후 역시 왕을 따라 작고(作故)하였다. 나라 사람들이 합해서 장사를 지내려고 하였더니, 큰 뱀이 쫓아다니면서 이를 방해하므로 다섯 부분을 다 각각 장사 지내어 다섯 능(陵)으로 만들었다. 이를 사릉(蛇陵)이라고 부르니 담엄사(曇嚴寺) 뒤에 왕릉이 바로 그것이다. 태자 남해왕(南解王)이 왕위를 계승하였다.
신라시조 박혁거세왕을 모신 능이 오릉
6부촌장이란..
신라 제3대 유리왕은 서기 32년 육촌을 육부로 개편하고 각 부에 성씨를 하사함으로써 6촌의 각 촌장들은 자동적으로 각 성의 시조가 된다. 소벌도리는 최(崔)씨의, 알평은 경주 이(李)씨의, 구례마는 손(孫)씨의, 지백호는 정(鄭)씨의, 지타는 배(裵)씨의, 호진은 설(薛)씨의 조상이 된다.
진한 땅에 옛날에는 여섯 마을이 있었다.
그 첫째의 것이 알천 양산촌(閼川楊山村)이니, 남쪽의 지금 담엄사 일대에 위치했었다. 이 마을의 우두머리는 알평(謁平), 그는 하늘에서 표암봉으로 내려왔다. 이 알천 양산촌의 우두머리 알평이 급량부(及梁部) 이씨(李氏)의 조상이 되었다.
그 둘째 것이 돌산 고허촌(突山高墟村)이다. 이 마을의 우두머리는 소벌도리(蘇伐都利). 그는 하늘에서 형산으로 내려왔다. 이 돌산 고허촌의 우두머리 소벌도리는 사량부(沙梁部) 정씨의 조상이 되었다. 이 사량부를 지금은 남산부라고 하며 구량벌, 마등오, 도북, 회덕 등의 남쪽에 있는 마을들이 이에 속한다.
그 셋째의 것은 무산 대수촌(茂山大樹村)이다. 이 마을의 우두머리는 구례마(俱禮馬: '俱'자 대신에 '仇"자를 쓰기도 함)인데, 그는 하늘에서 이산(伊山: 계비산이라고도 함)으로 내려왔다. 이 무산 대수촌의 우두머리 구례마는 점량부(漸梁部) 또는 모량부(牟梁部) 손씨(孫氏)의 조상이 되었다. 지금은 장복부(長福)라고 하여 박곡촌 등의 서쪽에있는 마을들이 이에 속한다.
그 넷째의 것은 취산 진지촌(嘴山珍支村)이다. 이 마을의 우두머리는 지백호(智伯虎)다. 그는 하늘에서 화산(花山)으로 내려왔다. 이 취산 진지촌의 우두머리 지백호는 본피부 최씨(崔氏)의 조상이 되었다. 지금은 통선부라 하여 시파 등의 남동쪽에 있는 마을들이 이에 속한다. 최치원이 바로 본피부의 사람이었다. 지금도 황룡사 남쪽에 있는 미탄사 남쪽에 옛터가 있어 그것이 문창후(文昌候) 최치원의 옛날 살던 집터 라고들 말하고 있으니 거의 틀림이 없다.
그 다섯째의 것은 금산 가리촌(金山加里村) 이다. 이 금산 가리촌의 우두머리 지타('祗陀'로도 씀) 한기부(韓岐部) 배씨(裵氏)의 조상이 되었다. 지금은 가덕부라고 하여 상서지 ·하서지 ·내아 등의 동쪽에 있는 마을들이 이에 속한다.
그 여섯째의 것은 명활산 고야촌(明活山高耶村)이다. 이 마을의 우두머리는 호진(虎珍), 그는 하늘에서 금강산으로 내려왔다. 이 명활산 고야촌의 우두머리 호진은 습비부(習比部) 설씨 (薛氏)의 조상이 되었다. 지금은 임천부라 하여 물이촌 ·잉구미촌 ·궐곡('葛谷'이라고도 씀) 등의 동북쪽에 있는 마을들이 이에 속한다.
이상 6촌에 관한 기록을 살펴보면 그들 6부의 조상이 모두 하늘로부터 내려온 것 같다. 노례왕 즉위 9년에 비로소 6촌을 6부로 개정하여 그 명칭을 고치고, 그리고 여섯 가지 성을 각각 내려 주었던 것이다. 오늘날 그곳 풍속에 중흥부를 어미라 하고, 장복부를 아비, 임천부를 아들, 가덕부를 딸이라고 하는데 그 연유는 자세하지 않다.
- 금강산 백률사의 북산 일대다. 여기 금강산은 경주 북쪽에 있는 산을 가리킴
역시 경주 북쪽의 금강산을 가리킨다.
- 『삼국사기』에는 '유리 이사금(儒理泥師今)'으로 되어 있다. 그 즉위 9년은 A.D.32년이다
이것은 혹시 '두레'의 조직에 관한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蘿井에서 발견된 구상유구 [고랑 모양 유적]
신라의 시조 박혁거세[朴赫居世]를 실존 인물이라고 쓴 '삼국사기' 의 초기 기록을 뒷받침 하는 유적이 발견 되었다.
중앙 문화재연구원 [원장 윤세영]은 지난 2002년부터 박혁거세의 탄생 신화가 깃든 경북 경주시 탑동 700 의 1번지 나정[蘿井'사적 245호]을 발굴조사한 결과 신라초기 우물과 건물의 흔적인 구상유구[溝狀遺構.고랑의 유적]등의 유적을 발견했다고 24일 밝혔다
이번에 발견된 유적은 ▲직경14 m.너비2m.깊이2m 의 원형 유구와 이 유구 바깥을 두른 목책의 흔적 ▲ 유구보다 후대에 만들어진것으로 보이는 8각 건물지 등이다.
원형 유구에서는 우물을 보호하기 위해 세워진 건물의흔적으로 보이는 기둥 구멍이 발견됐다. '삼국사기' 신라본기 제2대 남해차차웅3년[서기6년]조에는 "시조의 사당을 세웠다" 제21대 소지마립간 9년 [487년]조에는 "나정에 신궁[神宮]을 세웠다" 고 적혀있다. 연구원측은 "원형 우물과 건물은 제사시설인 8 각형 건물보다 앞서 지어진" 것 이라며 출토된 두형 토기가 1-2세기에 만들어진것임을 볼 때 '삼국사기' 기록인 박혁거세 사당. 신궁의 건립 내용과 일치하는 것으로 생각된다" 고 밝혔다.
박혁거세의 탄생지로 알려진 '나정'
'삼국사기' 신라본기에는 “기원전 69년 사로국의 6촌장이 나정 근처에 하늘로부터 신기한 빛이 비추고 있는 것을 보고 그곳으로 가니 큰 알이 하나 있었고, 알을 깨고 사내아이(박혁거세)가 나왔다” 고 기록돼 있다. 또 제2대 남해차차웅 3년(서기 6년)조에는 “시조의 사당을 세웠다”, 제21대 소지마립간 9년(487년)조에는 “시조의 사당에 제사하고 나정에 신궁(神宮)을 세웠다” 고 적혀 있다
나정이란 우물 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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