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우천황, 그는 살아있다 (2)

2015. 7. 9. 21:45History of Kore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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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우천황, 그는 살아있다 (2)

역사는 전설이 되고
전설은 신화가 된다,
이제는 원시반본하는 때로 우리는 민족의 뿌리와 역사를 되찾아야 한다.
치우천황은 4700년 전 한민족의 조상으로서
배달국의 14대 자오지천황이다.
중원을 호령하던 치우천황,
이제 역사의 대반전이 시작된다.

탁록의 승자
하북성 탁록현에서는 중국학자들이 주장하는 치우 무덤들을 만나볼 수 있다. 현재 중국에 알려진 치우의 무덤은 다섯 개에서 여섯 개 가량인데 주의 깊게 찾아보지 않는다면 위치를 확인하는 일도 쉽지 않다. 그 중 치우총이 세워진 곳이 치우의 동치우분이다. 동서로 마주보듯 반대편에 서 있는 탁록현 보대진 요자두촌에 있는 것이 서치우분이고, 회래현 이관영향 팔괘촌 부근에 탁록과 가까운 것이 동치우분, 그리고 황제성의 동남쪽 부근, 탑사촌 마을에 위치한 것을 남치우분이라 해서 지역을 나눠 이름 하였다.

“치우의 유해가 어떤 책에는 삼등분, 또 어떤 책에는 일곱 등분되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여기저기에 팔, 머리, 다리를 각각 분해해서 묻었다고 합니다. 그때 분리된 몸뚱이를 한곳에 합쳐 묻으면 다시 살아난다는 설이 있었어요. 그래서 황제가 시신을 분해해서 사방에 나눠 묻었다고 합니다. 내가 몇 년 동안 연구하고 또 다른 학자들과 고증해본 결과 남치우분이 머리를 묻은 묘라고 추정됩니다.” (조육대 / 전 삼조문화연구회 부회장)

 


남치우분을 찾아가던 중 취재진은 대를 이어 남치우분을 관리해 왔다는 한 주민을 만날 수 있었다. 남치우분이 위치한 이곳 탑산촌은 작은 가구로 이뤄져 있는데 모든 주민들은 산중턱의 묘가 치우의 것임을 알고 있었다.
치우의 부하가 주검을 싣고 달리다 말이 움직이지 않아 세워 묻었다는 전설을 가지고 있는 남치우분. 그곳이 바로 탑사촌 마을 뒷산이었던 것이다. 산중턱에는 흰색 바탕에 글씨가 새겨지지 않은 무자비가 하나 서 있는데 그 뒤가 치우의 무덤이라고 한다. 용으로 장식되어 있는 무자비는 한나라 때 만들어진 것으로 전해지는데 비문이 없는 것에 대해선 몇 가지 설이 있다.

“측천무후가 죽은 후에 비석을 세웠는데 그 비석에도 글이 없습니다. 또 하나의 설은 치우의 공덕이 너무 커서 비석에 글로 표현할 수 없다는 설입니다.” (조육대 / 전 삼조문화연구회 부회장)

탁록지역에 위치한 세 개의 묘. 하지만 이 외에도 역사가 증언하는 또 하나의 묘가 있다.
“치우의 무덤은 산동성 동평군 수장현 감향성 안에 있다.” (『사기』「집해」)

『사기』에서 말하는 치우의 무덤은 산동성 동평군에 위치하는데 실제 중국정부는 지난 1997년 이곳을 치우의 묘로 정식 승인하고 사당까지 지었다. 치우총이라는 정식 이름을 갖게 된 산동성 곡부 서남쪽에 위치한 이 무덤은 제 모습을 갖춘 지 겨우 7년밖에 되지 않는다. 1959년 이전만 해도 호수 속에 잠겨 있었다는 치우총은 새롭게 단장되어 있어 역사 속에 묻힌 치우의 부활을 알리는 듯하다.

중도박물관에 소장된 치우사 표지석. 치우총에서 출토된 이것은 예전에 이곳에 치우의 사당이 있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성을 보호하기 위해 물이 주변을 둘러싸게 하여 다리를 놓아 연결한 치우총은 중국에 남아 있는 치우의 무덤 중에 릉으로의 모습을 가장 잘 나타내고 있다.
자신을 찾아온 이를 기다렸다는 듯 무덤의 주변 가지런히 정리된 길이 인상적이다. 그러나 이 길은 신화를 따라온 이들에게 역사의 사실이 무엇인지를 안내하고 또 인도한다. 하지만 무덤의 주변은 선명히 볼 수 없는 과거의 시간이 얼마나 오래 전의 것인지를 말해주는 듯하다. 그렇다면, 역사 속에 탁록으로 기록된 반산진의 치우채는 과연 어떤 모습으로 남아 있을까?
마치 그랜드 캐년과 같은 습곡지형으로 요새를 이루듯 산으로 둘러싸인 이곳에는 치우와 황제가 싸웠던 고 전장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다. 황제성과 2.5킬로미터 떨어져 있는 치우북채는 북쪽으로 통하는 길이 있을 뿐 험난한 이 길을 가로질러 통과할 방법은 전혀 없어 보인다.

“치우북채는 높은 위치에 있고 앞에는 깊이 70미터의 큰 골짜기가 있어서 방어하긴 쉽고 공격하기는 어려운 요새와 같은 곳입니다.” (조육대 / 전 삼조문화연구회 부회장)

 


과연 황제헌원이 어떻게 이 요새를 뚫고 치우를 공격했는지는 설명할 방법이 없다. 다만 탁록산 줄기 아래 흐르던 계곡물은 젖줄이 되어 풍요로움을 보장했을 것이고 이곳이 그 누구도 탐낼 만한 지역이었음을 확인해볼 뿐이다.

치우는 황제와의 전쟁을 위해 세 개의 치우채를 꾸렸다. 그중 남채는 후방 보급기지 역할을 하였으며 중채는 지휘 본부가 되어 전쟁의 중심에 섰고, 북채는 앞서 최전방의 전투기지로의 역할을 했다. 중채, 남채, 북채는 골짜기를 사이에 두고 서로 마주보며 긴밀히 연결되어 있었는데 이것 역시 치우의 전략 전술 중 하나였다.

치우채가 있는 주변 마을에는 곳곳에 치우의 흔적이 남아 있다. 신라의 백제의 유물로 출토됐던 귀면와도 이곳에서 흔히 찾아볼 수가 있다. 치우송이라는 이름을 가진 소나무는 언뜻 보기에도 긴 세월이 느껴진다. 사람들은 천년이 넘은 이 고송을 ‘치우송’이라고 부르며 숭배해왔다.

성채 아래 있었을 것으로 추측되는 치우채의 젖 줄기 치우천. 그 옛날 치우의 병사들과 말이 이 물을 마시고 연전연승을 거뒀으니 그 이름도 ‘치우천’이다. 지금도 하루 800여톤의 물이 방출된다고 하니 이 지역 주민들에게 신비로운 전설을 가진 곳이다.

“최고의 전문가들이 탁록은 중화민족의 발상지이며 뿌리를 찾고 조상을 모시는 성지라고 인정했습니다. 최근 하북성의 학자와 관리들은 동방사람이 흙속(황하문명)에서 나왔고 중화문명은 탁록에서 나왔다는 말을 할 정도입니다. 그래서 탁록을 문명의 발상지이며 뿌리와 조상을 찾는 성지라고 함에 있어 부끄러울 것이 없다고 합니다.” (조육대 / 전 삼조문화연구회 부회장)

치우채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황제성이 보존되어 있다. 황제성은 가장 먼 것이 남북 540미터, 동서가 500미터나 되는 어마어마한 거성이다. 하지만 지금은 홀로 선 비석만이 이 거성의 존재를 말해준다. 중국인들의 시조로 알려진 황제지만 주변 보존은 치우채와 별 차이가 없다.

황제의 위엄을 알리는 듯 서 있는 성벽의 흙담에서는 당시의 건축기술을 확인해볼 수 있다. 발굴 당시 다양한 석기들이 대량으로 출토되었다는 성 근처에는 아직도 상당수의 도편들이 널려져 있다. 5천년 과거의 유물이 버려진 채 흩어져 있는 곳, 가치를 아는 이에겐 보물의 땅이다.

신석기 시대부터 춘추전국시대로 추정되는 역사의 유물까지 상고사를 연구하기 위해서라면 결코 피해갈 수 없는 역사의 대륙. 평지에서 물이 나와서 천을 이루었다고 알려진 황제천은 여름엔 썩지 않고 겨울엔 얼지 않고 가뭄이 와도 줄지 않는다고 하는데 검사결과 최고 수질의 광천수로 판명이 났다. 이 물은 빗물 등이 단열대를 따라 지하 깊은 곳에 흘러들어갔다가 다시 솟아오르는 것으로 하루에 약 4800톤의 물이 솟아오른다고 한다. 황체천의 물이 흘러와서 고여 있는 헌원호는 황제성의 해자로도 활용된 듯하다. 50여개의 다민족 국가인 중국인들이 시조인 황제의 유적지를 보호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이들이 황제가 아닌 치우의 유족을 보존하는 이유는 과연 무엇일까?

중국인의 시조로 모셔진 치우천황
그 해답은 바로 귀근원에서 찾아볼 수 있다. 뿌리로 돌아가자는 뜻을 가진 귀근원은 중국인들이 자신들의 시조라 생각하는 조상을 모셔놓은 사당이다. 그런데 여기에 치우가 있다.
중국인들의 시조를 모셔놓은 사당에 자리하고 있는 치우천왕. 이것은 중국인들이 상고사를 어떻게 재해석하고 있는지를 전적으로 대변한다. 중화민족의 세명의 시조. 중화삼조. 그 주인공은 ‘황제’와 ‘염제’를 비롯하여 우리의 조상으로 알고 있던 ‘치우’다.

“이 건물을 지을 때만 해도 <황제사>로 했는데 그후 인식이 바뀌면서 치우를 시조의 위치로 승화시키고 <중화삼조당>이라고 이름을 바꾼 것입니다.” (조육대 / 전 삼조문화연구회 부회장)

중국에서는 1980년대 이전까지만 해도 황제의 자손이라고 주장하다가 80년대 이후, 황제와 염제를, 90년대 이후에는 황제와 염제, 그리고 치우 모두가 자신들의 시조라고 주장하고 있다. 청동을 사용하고 가장 문명이 발달한 것으로 알려진 치우의 집단을 중국인들이 외면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역사서적에 치우는 청동의 아버지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치우는 중국에서 처음으로 청동을 발견한 사람입니다. 이런 면에서 볼 때 치우 집단의 문명이 가장 발달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조육대 / 전 삼조문화연구회부회장)

중화삼조당에 있는 한편의 그림에서도 황제가 그런 앞선 문명의 치우를 무찌르고 최고의 자리에 올랐음을 강조하고 있는데 취재진이 확인한 치우채의 실제 지형으로는 설명하기 어려운 사실이었다. 그러나 더욱 놀라운 것은 패배했다 해도 군신은 바로 치우였다. 황제에게 대항하다 죽임을 당했다는 치우는 왜 이제 중국민족의 시조가 되어 이 자리에 우뚝 서 있는 것이다.

“중국은 56개의 소수민족을 거느리고 있는 다민족국가입니다. 그래서 그 민족들을 통일하기 위해서 공자가 말했던 ‘대일통(大一統)’, 이것이 중화사상인데, 그것을 역사에 투영해서 모든 민족을 하나로 뭉치는 것을 목표로 삼고 있습니다.” (박성수 명예교수 / 한국학중앙연구소)

시조 연구를 통해 민족의 화합을 꾀하려는 이 운동은 전문사학자들의 체계적인 연구가 바탕이 되어 가능했던 일이다. 그중 탁록삼조문화연구회는 중국 상고사를 연구하는 단체로 황제와 염제신농, 치우에 관한 각각의 연구와 함께 삼조문화를 제시하였으며 이를 토대로 중국 민족에 대한 연구가 본격화됐다. 이들이 말하는 삼조문화를 정리해보면 다음과 같다.

중화민족의 문명을 시작한 시조는 염제와 황제, 그리고 치우까지 세 사람이며, 이 셋은 자신들의 마을에 대해 연명공동체를 이루었고, 이들이 함께 중화문명을 만들었다는 것이다. 이 주장을 다시 정리하면 문명을 시작하는 세 명의 시조들은 각각의 공동체를 이뤘으며 이것이 지금 다민족 국가인 중국, 중화민족을 만들었다는 것이다.

다민족을 하나의 공동체로 엮어내기 위한 중국의 역사 연구는 상당수 성공적인 결과들을 가져왔다. 지금 중국은 치우를 시조로 선택함으로써 중국 내 여러 민족들을 하나로 묶어내는 성과를 이뤄낸 셈이다.

 


치우천황을 조상으로 모시는 묘족
취재진이 마지막으로 찾아간 곳은 치우를 그들의 조상으로 섬기는 묘족의 자치주 호남성 화원현이다. 이곳 역시 처음 인상은 과학과 산업이 발달된 현대의 모습이다. 하지만 조금만 들어서보면 지역 곳곳이 옛 전통을 지켜가기 위해 노력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마을 어귀에서 처음 발견한 것은 치우동상. 우리네 마을의 장승과도 같이 이곳을 지키고 호위하듯 기운차게 서서 바라보고 있다. 마을의 모든 사람들은 치우를 조상의 왕으로 기억하고 있다. 긴 세월을 건너 다시 과거로 흘러들어간 듯 보이는 이곳 마을에는 이들의 주장처럼, 치우가 다스렸던 그의 민족들이 지금껏 평안히 살아가고 있다.

묘족이 언제부터 이곳에 정착했는지는 정확치 않지만 황제와의 전쟁 이후, 패한 치우의 무리들이 남쪽으로 흘러 내려왔고 그중 묘족이 이곳에 자리를 잡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묘족은 원래 황하 이북에서 살았습니다. 후에 묘족의 조상인 치우가 황제, 염제와 대전을 치렀는데 부족 간의 전쟁이었습니다. 그 후부터 남쪽, 처음엔 장강일대로 이동하기 시작했고, 결국 동정호와 파양호의 양쪽에 삼묘제국을 건설한 것입니다.” (떵야핑 / 전 길수시 여행국장)

마을 입구에는 치우의 토템으로 알려져 있는 소의 형상들이 조각되어 있다. 이 역시 역사의 흔적들이 바로 지금 박제처럼 남아 선명한 과거의 기록이 사실이었음을 말해주고 있다. 이들에겐 왕이고 민족의 시조이며 조상으로 알려져 있는 치우. 그들은 이 흔적을 지키기 위해 얼마나 오랜 시간 노력해 왔을까? 마을 어귀에 보존되어 있는 북 또한 치우를 상징하고 있다. 치우가 전쟁에 앞서 승리를 기원할 때 북을 울리며 승리의 진혼을 되새겼다고 한다.

“이전부터 염제와 황제는 각각의 부족을 형성하고 있었는데 두 부락 중에 누구도 치우와 싸워서 이기지 못했습니다. 치우는 전쟁에서 북을 쓰는 능력이 다양하고 뛰어났습니다.전쟁에서 능력이 뛰어나서 패하지 않는 전쟁의 신으로 불렸습니다.” (석계황 / 묘족법사)

중국인들에겐 신화와 전설만이 아닌 뜨거운 피의 조상으로 기억되는 치우천왕. 이제 우리도 민간의 신앙이며 악귀를 쫓았던 민족의 수호신에게 진짜 이름을 찾아주는 일을 늦춰서는 안 된다.

 


우리 삶속에 살아온 도깨비 상
얼마 전 <웃는 도깨비>라는 제목으로 도깨비 전시회를 열었던 가회박물관 윤열수 관장. 그는 도깨비에 대한 근원적 고민을 해본 적이 없을까?
“한국의 도깨비들이 대체적으로 다 웃고 있는 도깨비입니다. 그것은 우리 민족성과도 관계가 있습니다.” (윤열수 관장 / 가회박물관)

성내지 않고 웃고 있는 우리 도깨비의 모습은 우리 유물 곳곳에서 어디서든 환한 미소를 전한다. 그런데 이 도깨비의 얼굴을 가진 치우가 우리 역사 속에서 군신으로 상징됐던 적도 분명히 찾아볼 수가 있었다.

육군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 투구에는 주변을 장식한 원형장식을 발견할 수 있는데 이곳엔 치우의 모습이 새겨져 있다. 무관의 상징인 군사의 투구에 선명하게 새겨진 치우의 형상.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가? 비록 현대에 와선 도깨비란 이름으로 치부되었으나 싸움에 능했고 군신으로 알려진 치우의 능력을 닮고자 했음이 아닐까.

“《난중일기》를 보면 이순신 장군도 치우에게 제사를 지냈습니다. 치우상은 알게 모르게 죽 내려왔기 때문에 주변에서 흔하게 볼 수 있는 것입니다.” (김순규 교수 / 전 육군사관학교 전쟁사학)

전쟁을 이기게 할 군신이며 민족을 지켜주던 수호신으로, 또 위기 속에서 나라를 지켜주던 천신으로의 치우는 또렷이 자신의 형상을 드러내고 있다.

“궁궐의 지붕 같은 곳은 화재에 대비해서 물을 다스리는 신인 용을 부각시킵니다. 지붕 용마루에 용이 있는 것은 조선시대에 중국문화를 수용하면서 중국의 상징인 용을 많이 쓰기 시작했기 때문이고, 통일신라시대에 왕성했던 도깨비 문양은 서민사회에 들어가서 낮게 그리고 넓게 퍼지기 시작했습니다. 창경궁 옥천교 다리 아래 도깨비상이 있습니다. 도시나 궁궐을 건설할 때 가장 중요한 것 중 하나가 치수입니다. 그래서 물을 다스리는 상징으로 치우를 쓰고 또 궁에 들어가는 초입부에서 나쁜 기운을 막는 역할도 한다고 생각합니다.” (나선화 학예실장 / 이화여대 박물관)

보고 의식하지는 못했지만 우리의 삶 주변 속에서도 치우의 모습은 흔히 발견할 수 있었다. 역사의 한 페이지에 생생히 그 기록을 전하고 있는 치우천왕은 천수를 누렸을 뿐 아니라 이렇게 긴 세월동안 사람들의 곁에서 살아왔던 것이다.

우리는 그 한 가지 예를 전쟁 기념관에서 찾아볼 수 있었다. 1994년 6월에 개관한 전쟁기념관은 나라를 지켜온 조상들의 호국위훈을 기리고 추모하기 위해 세워졌다. 삼국시대부터 최근까지 전쟁과 군사에 관한 모든 자료들이 실증적으로 전시되어 있는 이곳 입구에서 우리는 익숙한 얼굴을 만나볼 수 있었다. 바로 치우천왕이었다.

이 문양을 직접 조각한 조각가 조백씨는 전쟁기념관의 천정 조각을 의뢰받고 오랜 시간 고심하여 이 얼굴을 새겨 넣었다고 한다. 도깨비로 알려져 있던 치우의 얼굴이 어떻게 전쟁기념관의 입구를 장식할 수 있었을까. 전쟁의 신이었던 치우가 스스로 자신의 모습을 드러낸 것은 아닐까.

“처음엔 도깨비만 생각하고 있었는데 조각을 다 완성해 놓고 나서 도깨비가 곧 치우라는 것을 후에 알게 되었습니다. 그 뒤 백제대향로 복각작업을 하게 되었는데, 백제대향로 뒷면에도 치우가 있더라구요. 그것을 보고 역사에 대한 아이러니를 상당히 많이느꼈어요.” (조백/조각가)

과거의 유물을 만나고 작업하면서 예기치 않은 기쁨을 만날 때가 많다. 그가 복원했다는 백제금동대항로. 이곳의 섬세한 문양 속에서도 치우의 모습을 만날 수 있었다. 과거의 유물로만 치부하기엔 너무도 많은 곳에 그의 형상이 있다.

민족의 군신, 역사로 되살아나다
종로구에 위치한 <치우학회>라는 이름을 가진 이곳에서는 벌써 몇 년째 치우에 대한 연구가 활발히 진행중이다. 이들은 유적에 남은 치우의 흔적을 찾아내고 이것을 기록 보존한다.

“지금은 강단사학자 뿐 아니라 대부분의 지식인들이 ‘치우’ 하면 중국의 신화 속 인물로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되면 치우가 왜 붉은악마가 되었는지 연결을 지을 수가 없습니다. 치우천황이 배달국의 14대 임금으로서 우리의 직계 조상임을 알았으면 좋겠습니다. 하지만 그것이 상당히 어렵습니다.” (박정학 회장 / 치우학회장)

창단 이후 치우학회에서는 세 권의 논문집을 발표했는데 치우의 뿌리를 캐기 위한 다양한 접근을 시도하고 있으며 최근 활발히 연구되는 중국연구를 파악하며 이를 분석하고 있다. 상고사에 대한 연구는 핵심 연구단체에서도 활발히 진행 중이다. 지난 9월 국사편찬위원회에서는 고조선을 중심으로 대한상고사 세미나를 갖기도 했다.

“우리가 상고사에 대한 문헌이 없다고 걱정들 하고 있는데, 사실은 치우를 중심으로 한 기록들이 중국기록에 나와 있습니다. 그래서 중국의 상고사가 바로 동이족의 상고사라는 것을 치우와 황제를 통해 알 수 있습니다. 중국의 문헌을 가지고 우리의 상고사를 복원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박성수 명예교수 / 한국정신문화원)

중국은 5천년 동안 지켜온 황제의 자손이라는 주장을 버리고 치우를 시조로 모시기 시작했다. 무엇 때문에 상고시대를 연구하며 치우를 등장시키고 있는지 알아야 한다. 스스로 모습을 드러낸 채 세계 속에 알려진 붉은 악마 속 치우천왕. 우리의 뿌리가 되고 근원이 된 역사의 흔적들을 이제 다시 붙잡아야 하지 않을까.

중국인들은 치우를 무서운 악마로 생각하여 매우 두려워하였다. 치우천왕의 활동으로 우리 민족은 무강한 민족으로 널리 알려졌으며 동시에 곧고 바르고 예의를 존중하는 민족으로 알려졌다. 역사는 5천년이 지난 지금에도 세상 속에 진실을 호령한다. 우리 민족의 군신이며 수호신, 그는 분명 우리 역사가 증거하는 불패신화의 주인공으로 신화가 아닌 역사로 우리 곁에 살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