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랩] 고구려벽화와 이집트벽화

2015. 7. 20. 21:03History of Korea

 

 

고구려와 이집트의 문명에는 사후세계(내세)의 영원한 삶의

신앙이 깔려있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고대인 그분들의 찬란했던 예술을 일부 소개합니다

 

1.고구려 벽화

 

고구려 수렵도

 

유효사거리가 강한 맥궁과 몸을 돌려 쫒아 오는 적에게 활을 쏘는

배사법은 오직 우리 동이족의

독창적인 전투기법으로 고대 한민족의 용맹성을 보여주는 벽화이다  

 

 

 

 

5世紀 平壤古墳壁畵로 본 高句麗 文化正體

 

동북공정으로 고구려의 찬란한 문화가 중국의 소수민족의

문화라 고 중국은 말한다

일본은 더 심각해서 역사를 아예 날조한다

일본의 역사왜곡은 712년부터 시작되어 수많은 역사를

왜곡하여 왔다 좋은 것은 무조건 일본 것으로 날조하여

역사를 인식시켜 나갔다 대영박물관에 전시된 유물들

이집트나 그리스 것들은 반드시 원산지를 명시 하여 전시

되는 것과 반대로 일본은 아예 자기것으로 만들어 전시하고

있다 1941년 일본미술사를 처음 공부하고 박사학위를 받았던

미국인 카터코벨은 1978년 화와이 대학을 은퇴하기 까지

일본 고고학을 연구 상당한 권위와 명성을 얻었었다

그러나 그녀는 한국미술를 보려고 체류 6개월예정을 8년으로

늘리며 공부하고 중국것 또는 일본 것으로 알아왔던 수많은

미술품들이 모두 한국 것임을 인지하고 180도 인생관이 달라졌다

그녀는 1981년 코리아 타임지에 내가 콜럼비아 대학에서 배운

일본사는 모조리 가짜였다는 글을 서두로 아들과 함께 모두7

의 관련 책을 발간하였다

AD427 5세기 문화의 중심이었던 5세기 평양 정치 문화

의 진행 사항은 고분의 벽화로 설명되어 있다

5세기 전반까지 평양주위 벽화의 주요테마는 일상생활 및

무덤의 주인 위주었으나 5세기 중기부터 신성한 로터스(연꽃)

장식 인물로 일부 벽화 무덤에서 그림의 주재로 선택되었다

평양은 고구려 시조 고주몽의 무덤으로 평양에서 5세기의

한가운데에 건설된 불교의 상징도시로 연꽃으로 장식하였다

고구려의 국가 전력 불교사상이 고구려를 지배했다

그 때문에 평양지역의 벽화에는 불교와 깊은 관련이 있었다

북한의 고구려 무덤단지 벽화는 200477월 그들은 마침내

유네스코 세계 문화유산이 되었다

중국이나 일본이 아무리 자기 것으로 날조 하여도 우리의

독창적인 예술은 누구도 흉내 낼 수 없는 것이다

 

 

 

 

무덤

성벽으로 둘러싸인 도시 요새 궁전과 무덤뿐 아니라 벽화와 유물의 고대 고구려

왕국의 무덤은 중국과 북한 국경의 양쪽에서뿐만아니라 한국에서도 발견되었다

중국의 인민공화국의 유적과유물은 초기 및 중간 기간 고구려 왕국의 역사와

문화를 반영하여 고구려 것으로 인정하였으나 동북공정의 여파로 차츰 그들의

유물로 동화 시켜나간다

고구려의 90개에 달하는 무덤은 중국 길림성 지안에 있고 북한의 평양과

남포근처에AD500년 시대의 벽화가 전시되어있다

 

 

 

관모를 쓰고 왼쪽과 오른쪽에서 자신을 보필하던

관리들이 머리를 조아리고 국가 업무를 논하고 있는 모습이다

 

안악3호분에서 발견된 귀족부부의 얼굴 상:남편은 정면을 바라본채

보고를 받으며 정무를 보고있고 부인은 남편을 향해 비스틈이 앉았다

 

그녀는 앉은 자세로

약간 남편으로 시선을 돌렸다 아내는 다소 포동 포동한 얼굴에 약간의 미소를

가지고 설명을 듣고 있으며 화려한 머리 조각을 입고 하녀들의 보살핌을 받으며

꽃 무늬 실크드레스를 입고 있다

 

 

 

행진도

천년이 넘은 세대 고대 고구려의 통치권자의 행차도는

근대에 들어선정조대왕 능행도나 별다른 점이없다

궁수들의 호위를 받고  행진하는 귀족

 

 

 

 

 

 

 

평양대성산 부근 고분에 있는 고구려 벽화로 북벽의 중앙에

보륜이 있고 좌우에 현무도를 그려 배치시켰다

 

 

해신

달신(月神) 으로 추정 하는 벽화

 

해와달신

 

 

 

삼실총 제1실 천장 고임면에 있는 주작(남쪽을 지키는 신) 그림.

 

안악3호분 전실 동쪽 벽면에 있는 수박놀이하는 力士그림

상투를 머리 뒤로 묶고 아랫도리 일부만 가린채

금방이라도 한번 맞붙을 기세다

역사들의 체구와 몸짓을 다소 희화학 적으로 과장되게 그렸다

 

기마궁술 대회도- 벽화를 보면,5개의 과녁이 세워져 있고 두 명의 경기자가 말을

 

고 달리면서 과녁에 활을 쏘는데,2개가 떨어졌고 3개가 남아 있다. 경기 성적을 기록하는

 

사람,심판을 보는 사람, 자기 차례를 기다리는 사람,경기를 진행하는 사람들이 보인다.

 

 

고구려의 기마궁술 경기대회에서 5개의 과녁을 사용하여 시험을 보는 것은,조선조 [경국

 

대전]의 병전에 보이는 무과의 기사에서 채용된 과녁의 숫자와 일치하고 있어,고구려

 

이후의 국가들은 모방했을 가능성이 높다.

 

 

덕흥리 고분은 고구려의 정치제도와 사회계급관계를 연구하는데 귀중한 자료를 제공해

 

주고 있다. 묘지명에 등장하는 관직명이나 기마 궁술 대회등 4세말에서 5세기 초의

 

고구려모습이다

 

 

 

 

 

 

 

 

 

 

 

 

고구려의 전투력

 

중국 길림성 집안현 여산 남쪽에 있는 고구려 고분

삼실층의 벽화중 攻城도 철재 투구와 갑옷으로중무장한 병사들이

기마전을 벌리고 있다

고구려는 용맹스러운 전투력으로 중국 군현을

압박하여 영토를 확장해 나갔다

 

 

고구려 수도였던 집안의 무용총 벽화 이벽화에는 고구려 저택의

응접실이 잘묘사되어 있다 평상이 여러개 놓여있고 사람들은 그평상

위로 신을 신고 올라간다

당시만 해도 마루전체에 구들을 깔지않고 한쪽에만 쪽구들을 놓았기

때문에 좌석과 입석이 겸해쓰여 졌다한다

벽화 그림에 손님이 왔는데 시종은 칼을 쥐고 고기를 자를 채비를

한다 고구려인들은 추운 지방이라 고기를 즐렸다 한다

 

 

 

당태종시대 장휘태자묘에서 발견된 이 벽화는 조우관(鳥羽冠. 새깃털을 장식한 모자)

을 쓴 인물(오른족에서 두 번째)이 신라 사신이라 알려졌지만 고구려 사신이라고

도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 오른쪽 여진족 가운데는 동로마제국의 사신이라 한다

다른 기록에 의하면 석가모니 열반식에 참석한 여러 외국의 왕자들과 함께 있는

모습인데 당시의 三國의 의상을 파악하는데 좋은 자료이다

 

고구려의 상징 삼족오(三足烏)는 고대 세발 까마귀로

일본에서는 축구협회의 표상으로 삼고있다  

야타가라스  (八咫烏 또는 金烏) 는 일본 건국신화에 나오는 우리의 삼족오와

비슷한 문양이지만 일본이 아무리 자기들 대륙진출을 말한다 할지라도

지리적 요건을 보더라도 대륙의 문화가 섬으로 전달 되지 섬에서 대륙으로

역 전달되지 않았다 하는것은 상식에 준한다 고구려 당시만 해도 일본에 거의80%가

한반도인 이었다 는것과 일황실도 고구려인의 피가 흐르고 있다는 추론이 있다

벽화 가운데는 삼족오 가 그려져있고 양옆에 용과 주작을 타고 노는 신선들의

모습이 그려져 있다

 

당시 한반도에는 사슴도 살았다 사냥꾼의 역동적인 모습에서 기마민족의 위상이 보인다

서역인과 고구려 인이 씨름하는 모습을 그린 각저총 벽화.

귀족들의 교통수단

 

일연이 쓴 삼국유사에 고구려민족은 춤추고 노래하기를 좋아했다

는 대목이 나오고 중국의 고문인 삼국지위지 동위전편에 동이족은

누에를 처 길쌈을 하며 술먹고 노래하고 춤추기를 좋아한다라고

기술 되어 있는데 우리민족의 춤사랑은 예부터 전하여져

지금 한류의 세계적인 인기가 이유가 있었던 것이었다

 

고구려 무희들

 

 

 

 

 

2.이집트 벽화

 

 

 

 

이집트 피라미드의 왕묘설 은 기원전 5세기에 이집트를 방문한

그리스의 역사가 헤로도토스(Herodotos B.C484-425)가 서술한

책에 피라미드 가까이에 있던 장로가 피라미드는 고대

이집트의 왕묘라고 말하였다라고 하는 근거와 피라미드에는

석관으로 보이는 돌상자가 있다 가 고 하는 근거로 오늘날까지

무덤이라 하는 것이 정설로 되었다 거기엔 벽화가 그려져 있다

이집트는 신화가 모든 것의 근원이다

신화가 바로 진정한 역사이다 라고 엘리아데는 말한다.

이집트의 문명은 死者의 문명이며 그 역사는 사자의 역사라

해도 과언이 아니라고 한다

.아몬.아톤.호루스.세트.프타.토트.이시스.오시리스 등 많은

신들이 함께 공존한다

그러나 죽음과 부활과 영생의 오시리스 사상이 밑바탕에

깔려있다

고대 이집트 예술의 프타는 본디 창조의 신이었다

이신이 창조한 질서는 모든예술에 공통되어 건축도 회화도 조각도

그 근저에는 이 법칙이 흐르고 있었고 특히 조형예술은 우주

만물의 조화에 합치되지 않으면 안되었다.

이집트의 미술품은 우리가 말하는 현대의 미술작품은 아니다

신전은 신의 영원한집이며 회화는 현실세계를 재현하는 수단

이며 조각은 인간의 영혼이 깃들이는 곳이었다 이러한 의미에서

이집트의 미술은 실효적인 목적을 가지고 있다. 신이 정한 법칙이

있는한 거기에는 염연하고 일정한 형식이 형식이 성립하여

예술가의 개성은 훨씬 뒤로 물러선다 이집트의 미술품이 일정한

양식을 고수하고 제작자의 이름이 표시되지 않는 까닦이다.

고대 이집트의 미술 활동의 역사는 모두 국왕의 보호 아래에

있었기 때문에 예술활동의 역사는 왕조 흥망의 역사와 일치한다

미술제작에 종사하는 자는 곧 국왕을 섬기는 관리였다

 

 

 

 

대영 박물관의 이집트 유물

1350 BC 주위 Nebamun 무덤 예배당의 한 장면 Nebamun 가축, 조각,

 

 

 

 

농부는 채찍으로 그들을 격려로 두 동물은 쟁기를 그립니다. 심기위한

씨앗이 들어있는 가방을 들고, 그 뒤에 소년을 알 수 있습니다.

농부는 채찍으로 쟁기를 보유한 소를 몰고 있고 아들인듯한 소년은

씨앗이 들은 통을 들고 뒤를 쫒으며 파종하는 모습이 그려져 있다

 

Sennedjem와 데이 르 엘 메디나 무덤 Sennedjems에서

그의 아내와 곡물을 수확하는 장면을 그렸다

 

두 노동자가 잘익은 포도를 선별하여 채취하고 있고 왼쪽의 사람들은

발로 밟아 와인을 생산하고 가운데 사람은 생산되는 와인을 처리하고 있다

 

 

키질하는 이집트인 나크트(Nakht)

무덤의 벽화 BC1415년경 타작된 곡식에 벼가

섞여 있는 겨가 날아갈 수 있도록 키를 사용하여

곡식을 공중으로 던져 올리고 있다

이러한 곡식 고르기는 우리나라에도 근세 까지

이어오는 생활 방식이었다

 

 

 

운반

 

 

 

 

 

 

 

이 여성 음악가들은 육감적으로 그려졌다 우아한 누드 류트 플레이어는

오른쪽 아름다운 하프 연주자의 반주와 중앙의 품격있는 플루트 맞춰진

왼쪽 춤을 추는 그녀의 머리가 중앙의 친구와 대화를 하며 유연한

춤추는 동작을 하고 있다

 

 

 

 

 

 

 

 

 

 

 

 

 

 

 

 

 

아시아인을 토벌하는 투탄카멘왕

 

 

 

 

 

 

 

 

 

 

 

 

 

 

신성 문자(神聖文字, Hieroglyph)는 고대 이집트의 돌이나 나무에 새긴 (상형) 문자를 지칭하는 낱말로서, 고대그리스어 "히에로글리피카 그람마타"(Hieroglyphica grammata: "신성하게 새긴 말")의 줄인 말이다. "능력의 말"이라는 뜻의 이집트어 "메두 네테르"(Medu Neter)를 번역한 데서 온 이 용어는 기원전 약 4세기 프톨레마이오스 왕조  시기까지 두루 사용되었다.이집트신화에 의하면 신성 문자는 서기의 신인 토트가 발명하여 인류에게 준 선물이라 전해진다. 더러는 마야문명·아스테카문명

문자 등 기타 상형문자를 지칭하는데 쓰이기도 한다. 고대 이집트에서는 히에로글리프 이외에 두가지 다른 문자들(신관문자 민중문자)을 사용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집트의 히에로글리프는 로제타석 의 발견과 더불어 19세기 초엽에 프랑스의 이집트학 학자

장프랑스아 샹폴리옹 에 의해 해독되었다.

 

각 글자들은 각종 동물이나 사물, 신체의 모습을 본뜬 모습을 하고 있다. 글자들은 3가지로 분류할 수 있다. 첫 번째는 소리 글자로, 그 모습과 상관없이 단어의 소리를 나타내는 데 쓰인다. 두 번째는 의미 글자(Determinatives), 소리 글자로 이루어진 단어의 맨 뒤에 붙어 그 단어의 뜻을 결정한다. 세 번째는 소리-의미 글자(Ideograms)인데, 그 자체로 소리와 의미를 모두 가진다.

 

신성문자는 왼쪽에서 오른쪽, 오른쪽에서 왼쪽, 위에서 아래의 세 가지 방법으로 기록된다. 문자에 등장하는 사람, 동물, 새의 머리는 언제나 글이 시작되는 방향을 향하고 있으므로 문자 속의 인물이나 동물들이 바라보는 방향에서 시작하면 된다. 아래에서 위쪽으로 읽는 법은 없다. 모아쓰기가 이루어지는데 한글처럼 규칙이 있는 것은 아니며, 모아쓰기된 글자들은 원래 읽는 방향대로 차례로 읽어가면 된다.

왕의 이름은 선으로 둘러싸여 있다. 이를 카류트슈(Cartouche)라고 한다. 이것이 로제타스톤

해석하는 결정적인 실마리가 된다.(위키백과)

 

 

상형문지

 

 

 

고구려 벽화 동영상

 

고대 미술사

 

이집트 벽화  

출처 : 평보의삽화로본세상
글쓴이 : 평보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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