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 8. 10. 14:40ㆍNaghammadi,나그함마디
사도께서 말씀하시기를, “너희가 하나님을 제대로 알면 바다 위를 걸을 것이요, 산을 부르면 산들이 오리라”라고
하셨다. 하나님의 영지에는 인식적인 영지와 정서적인 영지의 두 종류가 있다. 인식적 영지는 이 세상과 다음 세상의 모든 축복의
기초이니, 언제나 어떤 상황에서나 인간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에 관한 앎이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내가 영들과 인간들을
창조한 것은 그들이 나를 섬기도록 하려는 것이다”(코란 51:56)라고 말씀하신 바와 같다. 즉, “그들이 나를 알도록 하려는
것이다“라는 말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선택하사 그 마음을 하나님 자신과 함께 다시 살게 하신 자들 외에는 많은 사람들이 이러한
의무를 저버리고 있다. 영지는 하나님을 통해 마음이 생명을 얻는 것이며, 인간의 가장 내면의 생각이 하나님이 아닌 것에게서
떠나는 것이다. 모든 사람의 가치는 영지에 비례하며, 영지가 없는 사람은 아무런 가치도 없다. 신학자들과 율법학자들과 기타
계층의 사람들은 하나님에 대한 올바른 인식(ʻilm)을 영지(maʻrifat)라고 하지만, 수피 스승들은 하나님에 대한 올바른
느낌(l)을 영지라고 부른다. 이와 같이 그들은 영지가 인식보다 더 뛰어난 것이라고 말했다. 올바른 느낌은 올바른 인식의
결과이지만, 올바른 인식이 올바른 느낌과 같은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즉, 하나님에 대한 인식을 지니지 않은 사람은
영지주의자(ʻarif, 영지를 지닌 자)가 아니지만, 영지주의자가 되지 않고도 하나님에 대한 인식을 지닐 수는 있다. 이러한
구별을 모르는 사람들은 쓸데없는 논쟁에 빠져, 한 쪽에서는 다른 쪽을 믿지 않았다. 이제 나는 양쪽이 모두 교훈을 얻도록 이
문제를 설명하려고 한다.
제1절
당신은 영지와 하나님에 관한 인식을 다루는 아주 다양한 견해가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무타질라파(Muʻtazilites)는 영지가 지성적이므로, 오직 이성적인 사람만이 그것을 지닐 수 있다고 주장한다. 이슬람에서는
미친 사람이 영지를 지녔다고 여기며, 이성적이지 않은 어린 아이들도 신앙을 지니고 있다고 여긴다는 사실로 이러한 교리를 부정할
수 있다. 영지의 기준이 지성적인 것이라면, 이런 사람들은 영지가 없어야 하고, 불신자들도 이성적인 존재이기만 하다면 신앙이
없다고 할 수 없다. 이성이 영지의 원인이라면, 이성적인 모든 사람은 하나님을 알아야 하고, 이성이 없는 모든 사람은 하나님에
대해 무지해야 한다. 그것은 분명히 불합리한 것이다. 다른 이들은 논증이 하나님에 관한 앎의 원인이며, 그런 앎은 이런 방식으로
그것을 추론하는 사람들이 아니면 얻을 수 없다고 주장한다. 이 교리가 맞지 않는다는 것은 이블리스(Iblis)의 예에서 확인할
수 있다. 왜냐하면, 그는 낙원과 지옥과 하나님의 보좌와 같은 여러 증거를 보았지만, 그로 인해 영지를 얻지는 못했기 때문이다.
하나님에 대한 앎은 하나님의 의지에 달려 있다고 하나님께서 말씀하셨다(코란 6: 111). 정통 모슬렘들의 견해에 의하면,
이성이 건전하다는 것과 증거를 확인하는 일은 영지로 가는 수단이기는 하지만 영지의 원인은 아니다. 영지의 유일한 원인은 하나님의
의지와 은혜이다. 하나님의 은혜가 없으면 이성은 눈먼 것이기 때문이다. 이성은 자신조차 알지 못하는데, 어떻게 다른 것을 알 수
있겠는가? 모든 종류의 이단들은 논증적인 방법을 이용하지만, 그들 대부분은 하나님을 알지 못한다. 반면에, 누구든 하나님의
은혜를 입으면, 그 때마다 그의 모든 행위는 영지의 수많은 표시가 된다. 그의 논증은 탐구이며 그가 논증을 소홀히 함은 하나님의
의지에 맡긴 것이다. 완전한 영지에 관해서는 포기보다 탐구가 더 낫다. 탐구는 무시할 수 없는 원리이지만, 포기는 동요의
가능성을 배제하는 원리이며, 이 두 원리는 본질적으로 영지를 포함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실제로 인간의 유일한 안내자이자
깨닫게 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시다. 이성과 이성에 의한 증명으로는 아무도 바른 길로 갈 수 없다. 불신자들이 심판의 처소에서 이
세계로 돌아온다 하더라도, 그들은 자기들의 불신을 가지고 돌아올 것이다(비교, 코란 6:28). 신자들의 사령관이신
알리(ʻAli)께서 영지에 대해 질문을 받으셨을 때, “나는 하나님에 의해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의 빛에 의해 하나님 아닌 것을
안다”라고 말씀하셨다. 하나님께서는 육체를 창조하시고 영(jan)에게 그 생명을 맡기셨으며, 영혼(dil)을 창조하시고는 그
생명은 하나님 자신에게 맡기셨다. 이와 같이 이성과 인간의 기능과 증거는 육체가 살도록 할 아무런 능력도 없기 때문에, 그것들은
영혼을 살게 할 수 없다. 이는 하나님께서, “죽었다가 우리가 소생케 하고 빛을 주어, 사람들 가운데 걷게 한 자가
...”(코란 6:122)라고 말씀하신 바와 같다. 즉, “나는 빛의 창조주이니 믿는 자들이 그 속에서 비춤을 받는다”라는
말씀이다. 인간의 마음을 열고 봉인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시다“(코란 39:23, 2:6). 그러므로 하나님만이 인간을 인도하실 수
있다. 하나님 외의 모든 것은 원인이나 수단이며, 원인이나 수단은 원인을 일으키신 분의 은혜가 없으면 올바른 길을 가리킬 수
없다. 신앙의 의무를 부여하신 분은 하나님이신데, 신앙은 본질적으로 영지이다. 그 의무를 부여받은 사람들은 의무의 상태에 있는
한, 자신들에게 신앙을 부여하지도 않고, 자신들의 선택에 의해 신앙을 자신들에게서 제거하지도 않는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알게
하시지 않는 한 인간은 영지를 얻을 수 없다. 아불 하산 누리(Abu ʼl-Hasan Nuri)는 ”하나님 자신 외에는 아무도
하나님께로 가는 길을 가리켜 줄 수 없다. 앎은 하나님을 바르게 예배하는 것을 통해서만 추구할 수 있다“라고 말했다. 어떤
피조물도 누구를 하나님께로 인도할 수 없다. 논증에 의지하는 자는 아부 탈립(Abu Talib)보다 더 이성적이지 않으며, 어떤
안내자도 무함마드보다 더 위대하지 않다. 그러나 아부 탈립은 비참해지도록 예정되어 있었고, 무함마드의 인도는 그에게 소용이
없었다. 논증의 첫 단계는 하나님에게서 돌아서는 것이니, 논증은 다른 어떤 것을 고찰하는 것이지만, 영지는 하나님이 아닌 모든
것에게서 돌아서는 것이기 때문이다. 보통의 탐구대상은 논증을 통해 알 수 있지만, 하나님에 대한 앎은 전혀 다른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에 대한 앎은 이성의 끊임없는 당황을 통해서만 얻을 수 있으며, 하나님의 은총은 인간의 어떤 획득행위를 통해서도
얻을 수 없고, 다만 기적으로 인간의 가슴에 계시되는 것이다. 하나님이 아닌 것은 현상적이며(muhdath), 현상적인 존재는
자신과 같은 다른 것에 이를 수 있지만, 그 자신이 존재하는 한, 자신의 창조주에게는 이를 수도 없고 얻을 수도 없다. 모든
획득행위에서는 획득하는 자가 우세하고, 획득되는 것은 그의 지배 아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기적이란 이성이 그 행위에 의해
자신의 동인(動因: 하나님-역주)이 존재한다는 것을 확인하는 것이 아니라, 신자가 진리의 빛에 인도되어 자신이 존재한다는 것을
부정하는 것이다. 얻어진 지식은 어떤 경우에는 논리의 문제이지만, 다른 경우에는 내적인 체험의 문제가 된다. 이성이 영지의
원인이라고 보는 자들은 이성이 그들의 마음 속에서 영지의 본질에 대해 무엇을 확인해 주는지를 고찰해 보아야 한다. 영지는 이성이
확인해 주는 것은 무엇이든지, 즉 이성에 의해 형성될 수 있는 어떤 하나님 개념이든지 모두 부정하기 때문이다. 실제로 하나님은
그와는 다른 무엇이다. 그러면 이성이 논증에 의해 영지에 이를 여지가 있을까? 이성과 상상력은 같은 종류인데, 종(種)을
주장하는 곳에서는 영지를 부정한다(영지는 일체의 종[種]을 넘어서는 것이기 때문이다-역주). 지성적인 증거에 의해 하나님의
존재를 추론하는 것은 하나님을 자신과 동화(同化)하는 것(tashbíh)이고, 같은 근거로 하나님의 존재를 부정하는 것은
하나님을 폐기(廢棄)하는 것(taʻtíl)이다. 이성은 이 두 가지 원리를 넘어서지 못하는데, 이 원리들은 영지에 대해서는 알
수 없다. 그 원리를 말하는 사람들 중 누구도 유일신론자(muwahhid) 이 말을 영어로 Unitarian이라고 번역하고
있는데, Unitarian은 일반적으로 삼위일체설을 부정하고 유일신격만을 주장하는 그리스도교의 일파를 말하는 것이지만, 여기서는
단지 유일신, 즉 궁극적인 하나만을 믿는 사람을 뜻한다(역주).
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성이 가능한
멀리 떠나고,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자들의 영혼이 하나님을 찾을 필요가 있을 때, 그들은 어쩔 수 없이 자신들의 기능(이성과
오감의 작용-역주) 없이 쉬게 되는데, 그들이 그렇게 안식하는 동안 그들은 불안해져서 손을 내밀어 간청하고, 자신들의 영혼을
위해 안식을 추구한다. 그들이 자기 힘이 닿는 대로 온갖 방법으로 탐구를 다 했을 때, 하나님의 권능이 그들의 것이 되나니, 즉
그들은 하나님에게서 하나님에게로 가는 길을 발견하고, 결핍의 고뇌에서 벗어나 친교의 정원에 발을 들이고 안식을 얻는다. 이성은
영혼들이 그 바람을 성취한 것을 볼 때 통제력을 행사하려고 하지만 실패하고, 실패하면 혼란해지며, 혼란해지면 자리에서 물러난다.
그 때 하나님께서 이성에게 섬김(khidmat)의 옷을 입히시고 이렇게 말씀하신다. “네가 독립하여 있었던 동안에 너는 네
기능과 그 작용에 가려 있었으나, 그것들이 사라졌을 때 너는 실패했으며, 실패한 후에야 너는 진정으로 얻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 가까워지는 것이 영혼의 정해진 몫이며, 이성의 몫은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다. 하나님은 인간이 어떤 기능과도 연결되지
않은 앎에 의해 하나님 자신을 통해 하나님을 알도록 하신다. 그 앎에서는 인간의 존재가 단지 비유(譬喩: 자성[自性]이 없는
존재라는 뜻-역주)일 뿐이다. 이와 같이 영지주의자에게 이기주의는 극도의 배반이며, 그가 하나님을 기억하는 것은 망각이 없는
것이고, 그의 영지는 빈 말이 아니라 실제적인 느낌이다.
또 다른 이들은 영지가 영감(ilham)의 결과라고 단언한다.
이것도 불가능한 일이니, 영지는 진리와 거짓을 구별하는 기준을 제공하지만, 영감을 받은 사람들은 그런 기준이 없기 때문이다.
만일 어떤 사람이 “나는 영감으로 하나님이 우주에 계신 것을 안다”라고 말하고, 다른 사람은 “나는 영감으로 하나님이 우주에
계시지 않은 것을 안다”라고 말한다면, 이 모순인 진술 중 하나는 참이어야 하지만, 어느 것이 진리인지를 결정하기 위해서는
증거가 필요하다. 결국, 브라만들과 영감주의자들(ilhámiyán)이 주장하는 이 견해는 무의미해진다. 이 시대에 나는 그것을
극단적으로 주장하여 자신들의 입장을 종교적인 사람들의 교리와 결합시킨 사람들을 많이 만났다. 그러나 그들은 모두 오류에 빠진
것이며, 그들의 주장은 이성적인 모든 모슬렘들과 비신자들에게 혐오스런 것이다. 만일 성스런 율법과 대립하는 것은 영감이 아니라고
한다면, 나는 이러한 주장은 근본적으로 불건전하다고 답변한다. 영감을 성스런 율법의 기준으로 판단하고 증명한다면, 영지는 영감에
의거한 것이 아니라 율법과 예언과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의거한 것이기 때문이다.
다른 이들은 하나님에 관한 앎이 직관적인
것(darúrí)이라고 주장한다. 이것도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이런 방식으로 알려진 모든 것은 모든 이성적인 인간이 공통으로
알아야만 하는데, 우리가 이성적인 인간 중 일부가 하나님의 존재를 부인하고 동화와 폐기의 교리를 주장하는 것을 보는 한,
하나님에 관한 앎이 직관에 의한 것이 아님을 입증한 것이다. 나아가, 만일 그렇다면, 종교적 의무의 원리는 파괴될 것이니, 그
원리는 자신의 자아, 하늘과 땅, 낮과 밤, 즐거움과 고통 등과 같은 직관적인 지식의 대상에 적용될 수 없다. 이러한 것들의
존재에 대하여 이성적인 인간은 누구라도 아무 의문을 품을 수 없으므로, 우리는 우리 의지에 거슬러서라도 그것을 알아야 한다.
그러나 수피즘에 뜻을 둔 어떤 사람들은 자신들이 느끼는 절대적 확실성을 고찰하여, 이 확실성에 직관이라는 이름을 붙이고는,
“우리는 하나님을 직관적으로 안다”라고 말한다. 본질적으로 그들은 옳다. 그러나 그들의 표현은 잘못된 것이다. 직관적인 지식이
완전한 자들에게만 국한될 수는 없기 때문이다. 반대로, 그것은 이성적인 모든 인간에게 속한다. 더욱이, 그것은 살아 있는
피조물들의 마음에 아무런 수단이나 증거 없이 나타나지만, 하나님에 관한 지식은 수단(sababí)이다. 니샤푸르의 종교지도자이자
스승이신 아부 알리 다까끄(Abu Ali Daqqaq)와 스승이신 아부 살 술루키(Abu Sahl Suluki)와 그의 아버지는
주장하기를, 전문적인 지식은 처음에는 습득하는 것이지만 결국은 직관적인 것처럼, 영지의 시작은 논증적이며 그 마지막은
직관적이라고 한다. 그들은 이렇게 말한다. “천국에서는 하나님에 관한 지식이 직관적이라는 것을 모르는가? 그것이 이 세상에서는
왜 직관적이어서는 안 되는가? 사도들이 직접적으로든 천사를 통해서든 계시를 통해서든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을 때, 그들은 하나님을
직관적으로 알았다.” 나는 낙원의 거주자들이 낙원에서는 하나님을 직관적으로 안다고 말한다. 낙원에서는 종교적 의무가 부여되지
않으며, 사도들은 마지막에 하나님에게서 분리되리라는 두려움이 없었고, 하나님을 직관적으로 아는 사람들과 동일한 확신을 누리기
때문이다. 영지와 신앙의 뛰어남은 그들의 존재 속에 숨겨져 있다. 그들이 눈에 보이게 되었을 때, 신앙은 의무적인 것이 되고,
그 눈에 보이는 실체에 대해서는 더 이상 자유의지가 없고, 종교적 율법의 기초가 흔들리며, 배교의 원리는 사라져,
발람(Balam) 코란 7:174에 나오는 바이다위(Baydawi)를 보라.
과 이블리스(Iblis)와
바르시사(Barsisa) Goldziher & Landberg, Die Legende vom Mönich
Barsīsā(1896)와 M. Hartmann, Der Heilige Barsīsā in Der Islamische
Orient(1905), i, 23-8을 보라.
가 불신자라고 하는 말도 맞지 않는다. 그들이 하나님에 관한 지식을
지녔다는 것은 일반적으로 인정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영지주의자가 영지주의자로 남아 있는 한, 그 사람은 하나님에게서 분리되리라는
두려움이 없다. 분리는 영지를 잃음으로써 생기지만, 생각컨대 직관적 지식은 잃을 수 없기 때문이다. 이 교리는 세속인들에게
지극히 위험한 것이다. 당신이 나쁜 결론을 피하려면, 인간의 앎과 하나님에 관한 인간의 영지가 진리의 가르침과 영원한 인도에
전적으로 근거해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인간은 영지에 대해 때에 따라 확실할 수도 있고 좀 덜 확실할 수도 있다. 그러나
영지의 원리는 늘거나 줄지 않나니, 어느 경우에도 손상되지 않기 때문이다. 당신은 하나님에 대한 당신의 앎을 맹목적으로
확신해서는 안 되며, 하나님의 완전하심의 특질을 통해 하나님을 알아야 한다. 이것은 오직 우리 마음을 절대적으로 관할하시는
하나님의 섭리와 은총을 통해서만 얻을 수 있다. 만일 하나님이 원하시면, 하나님은 자신의 행위 중 하나를 가지고 그 분
자신에게로 가는 길을 우리에게 알려 주시는 인도자로 삼으시며, 만일 하나님이 다른 것을 원하시면, 하나님은 같은 행위를 가지고
우리가 그 분 자신에게 이르지 못하게 하는 장애물로 삼으신다. 그러므로 예수는 어떤 사람들에게는 영지로 인도하는 안내자였지만,
또 다른 사람들에게는 영지로 가지 못하게 하는 장애물이었다. 앞의 사람들은 “이 분은 하나님의 종이시다”라고 말했고, 뒤의
사람들은 “이 분은 하나님의 아들이시다”라고 말했다. 마찬가지로 어떤 사람들은 우상과 해와 달을 통해 하나님께로 인도되었으나,
다른 이들은 길을 잃었다. 그런 안내자들은 영지의 수단이요 직접적인 원인이 아니다. 하나의 수단을 그들 모두의 창조주이신
하나님과 관계에서 보면, 하나의 수단이 다른 수단보다 더 나은 것은 아니다. 수단에 대한 영지주의자의 주장은
이원론(zunnar)의 징표이며, 앎의 대상을 제외한 어떤 것에 대해서도 다신론(shirk)이다. 보존된 서판(書板)에서, 아니
하나님의 의지와 지식에서 사람이 파멸하도록 정해져 있을 때, 어떤 증거와 논증일지라도 어떻게 그를 바른 길로 인도할 수
있겠는가?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께서는 원하시는 대로, 자신이 원하시는 수단을 통해 그의 종에게 그 분 자신에게로 가는 길을 알려
주시며, 그에게 영지의 문을 열어 주시어, 영지의 본질 자체가 낯설게(ghayr) 보이고 그 특질들이 그에게 해로와지는
정도에까지 이르게 하시나니, 자신의 영지로 인해 그는 알려진 대상을 보지 못하고, 그의 영지가 자만(自慢, daʻwa)임을
깨닫는다. 이집트 사람 둘 눈(Dhu ʼl-Nun)은 “네가 영지에 대해 자만하지 않도록 조심하라”라고 말한다. 그것은 다음
구절에 나와 있다.
“영지주의자들은 앎을 뽐내지만,
나는 무지를 고백하나니, 그것이 나의 앎이다.“
그러므로 자만 속에서 멸망하지 않으려면, 영지를 주장하지 말고, 그 실상에 매달려 구원을 받도록 하라. 누구든지 하나님의 계시로 인해 존경을 받으면, 그의 존재가 그에게 재앙이 되며, 그의 모든 특질은 타락의 원천이 된다. 하나님께 속하고 하나님이 그에게 속한 사람은 우주에 있는 어떤 것과도 관계가 없다. 영지의 진정한 요지는 하나님 나라가 하나님께 속한 것임을 인식하는 것이다. 어떤 사람이 모든 소유가 하나님의 절대적인 관할 하에 있음을 알면, 그 사람이 인류와 더 이상 무슨 볼 일이 있어서 사람들이나 자신이 하나님을 가리도록 하겠는가? 그런 모든 가림은 무지의 결과이다. 무지가 사라지면, 곧 그것들도 사라지고, 현세와 내세가 같아진다.
제2절
이제 가르침을 위해 나는 샤이크들께서 이 주제에 대해 말한 수많은 말 중 몇 가지를 말하려고 한다.
압달라
이븐 무바라크는 “영지는 어떤 것에도 놀라지 않는 데 있다”라고 말한다. 놀람은 행위자의 능력을 넘어서는 행위에서 나타나는데,
하나님이 전능하시므로 영지주의자는 하나님의 행위로 놀랄 수가 없기 때문이다. 만일 놀랄 여지가 있다면, 하나님이 한 줌의 흙을
들어올리는 것을 그 흙이 하나님의 명령을 받아들인 것으로 보고 놀라야 하며, 한 방울의 피에 대해서는 그것이 하나님에 관한
사랑과 지식에 대해 말하며, 하나님을 보기를 추구하고 하나님과 하나 되기를 갈망하는 것으로 보고 놀라야 한다. 이집트인 둘 눈은
이렇게 말한다. “영지는 실제로 하나님께서 섭리로 영적인 빛을 우리의 가장 깊은 마음에 전해 주시는 것이다.” 즉, 하나님이
자신의 섭리 속에서 인간의 마음을 비추어 주사 마음이 물들지 않게 하셔서, 그의 마음 속에서는 모든 피조물이 한 알의 겨자씨만한
가치도 없도록 하시고, 내적으로나 외적으로나 하나님의 신비에 대한 관상이 그를 환희로 압도하지 못하게 하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이렇게 하시면, 그가 보는 것마다 모두 관상(觀想, mushahadat)의 행위가 된다. 경탄에는 두 종류, 즉
(1) 본질에 대한 경탄과 (2) 특질에 대한 경탄이 있다. 전자는 다신론이자 불신앙이니, 어떤 영지주의자도 하나님의 본성에
대해 의심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후자는 영지이니, 하나님이 특질은 이성의 영역을 넘어서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어떤
사람은 “오 경탄하는 자들의 안내자시여, 저의 경탄을 더하소서!”라고 말했다. 먼저 그는 하나님의 존재와 그 분의 특질들의
완전함을 단언하고, 하나님께서 인간의 탐구의 대상이시며 인간의 기도를 성취하시는 분이시고 인간의 경탄을 지으시는 분이심을
인식했다. 그리고 그는 경탄을 더해 달라고 간구했으며, 하나님을 찾는 일에 이성은 경탄을 하든지 다신론에 빠지든지 하는 것 외에
다른 길이 없다는 것을 인식했다. 이 정서는 매우 섬세하다. 또 하나님의 존재에 관한 앎은 그 자체에 경탄을 포함하고 있으니,
어떤 사람이 하나님을 알 때, 그는 자기 자신이 하나님의 전능하심에 완전히 정복당했음을 본다. 그의 존재가 하나님을 의지하고
있고 그의 비존재는 하나님에게서 나오며, 그의 휴식과 움직임이 하나님의 권능에서 나오므로, 그는 경탄하여 “나는 누구이며
무엇인가?” 하고 말하게 된다. 이런 의미에서 사도께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자신을 아는 자는 그의 주님을 알게 된 것이다.”
이 말은, 자신이 소멸되었음을 아는 사람은 하나님이 영원히 존재하심을 안다는 것이다. 소멸은 이성과 인간의 모든 특질을
파괴하는데, 한 사물의 본질이 이성에 접근할 수 없다면, 그것은 경탄이 없이는 알려질 수 없다. 아부 야지드는 말했다. “영지는
인간이 움직이고 쉬는 것이 하나님께 달려 있다는 것을 아는 데 있다.” 또 하나님의 허락 없이는 아무도 하나님 나라를 조금이라도
지배하지 못하며, 하나님이 행위할 능력을 창조하시고 그 마음에 행위할 의지를 넣어 주시기까지는 아무도 어떤 행위도 할 수 없고,
인간의 행위는 비유적이며, 하나님이 진정한 행위자라는 것을 아는 데 있다고 했다. 무함마드 이븐 와시는 영지주의자를 이렇게
묘사했다. “그는 말이 없고 끊임없이 경탄한다.” 유한한 것만이 말로 표현할 수 있고, 무한한 것은 표현할 수 없으므로,
끊임없이 경탄하는 것 외에 다른 방법이 없기 때문이다. 쉬블리는 말한다. “진정한 영지는 영지를 얻을 능력이 없는 것이다.”
이는 어떤 사물을 알 능력이 없는 것인데, 인간은 그 사물의 진정한 본질을 얻을 수 없다는 것 외에 거기에 이를 아무런 단서도
가지고 있지 않다. 그러므로 그것을 얻을 때, 무능함(ʻajz)이 탐구이므로, 그가 자신을 전혀 믿지 않는 것이 올바른 일일
것이다. 그가 자신의 능력과 특질을 의지하는 한 그는 그 말(무능하다는 말-역주)로 표현할 수 없다. 이런 능력들과 특질들이
떠날 때, 그의 상태는 무능함이 아니라 소멸이다. 잘난 체하는 어떤 사람들은 인간의 특질과 건전한 판단을 할 의무의 존재와,
하나님의 증거에 의해 자기들에게 부여되었다고 하는 권위를 주장하면서, 영지는 무능함이며 자기들은 무능하여 아무 것도 얻을 수
없다고 단언한다. 나는 “당신들은 어떤 것을 추구하다가 그렇게 어찌할 바를 모르게 되었는가?” 하고 묻는다. 무능함에는 두 가지
징표가 있는데, 당신들에게서는 그것을 볼 수 없다. 첫째는 탐구능력의 소멸이고, 둘째는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나는 것이다. 능력이
소멸되는 곳에는 외적인 표현이 없으며, 하나님의 영광이 계시되는 곳에서는 아무런 단서도 주어지지 않고, 아무런 분별도 생각할 수
없다. 그러므로 무능한 자는 자신이 그러한지 알지 못하거나, 자신의 상태가 무능함이라고 부르는 것임을 알지 못한다. 그가 어떻게
그것을 알겠는가? 무능함은 하나님과 다르고, 하나님과 다른 것에 대한 앎을 주장하는 것은 영지가 아니다. 마음 속에 하나님 외의
어떤 것을 받아들일 여지가 있는 한, 또는 하나님 외의 어떤 것을 표현할 가능성이 있는 한, 아직 진정한 영지를 얻은 것이
아니다. 영지주의자는 하나님이 아닌 모든 것에서 돌아설 때까지는 영지주의자가 아니다. 아부 하프스 핫다드는 말한다. “내가
하나님을 안 이래로, 진리도 거짓도 내 마음에 들어오지 못했다.” 인간이 욕망과 정념을 느낄 때, 그는 영혼(dil)에게
돌아서는데, 이는 그 영혼이 자기를 거짓의 거처인 낮은 영혼(nafs)에게로 인도하도록 하려는 것이다. 인간이 영지의 증거를
발견할 때, 그도 영혼에게로 돌아서는데, 이는 그 영혼이 그를 진리와 실재의 근원인 영에게로 인도하도록 하려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 외의 어떤 것이 영혼에 들어올 때, 영지주의자가 그 영혼에게로 돌아서면, 그는 무지의 행위를 범하는 것이다. 영혼에게로
돌아서는 자와 하나님께로 돌아서는 자 사이에는 큰 차이가 있다. 아부 바크르 와시티는 말한다. ”하나님을 아는 자는 만유에게서
끊어진다. 아니, 그는 말을 잊고 멍청해진다.“ 즉, 그는 아무 것도 표현할 수 없고, 그의 모든 특질은 사라진다. 그러므로
사도는 망아상태에 계실 때 이렇게 말씀하셨던 것이다. ”나는 아랍인과 비아랍인 중에서 가장 말을 잘하는 사람이다.“ 그러나 그가
하나님의 현존하심을 향해 태어났을 때, 그는 이렇게 말했다. ”저는 당신을 어떻게 찬양하는지 알지 못하나이다.“ 그러자 이런
대답이 왔다. ”오 무함마드여, 네가 말하지 않으면 내가 말할 것이요, 네가 스스로 나를 찬양할 자격이 없다고 여기면, 내가
우주로 하여금 네 대리자가 되어 그 모든 원소들이 네 이름으로 나를 찬양케 하리라.“
합일(tawhid)
하나님께서 말씀하셨다. “너의 하나님은 한 분이시다”(코란 16:23). 또 “‘하나님은 한 분이시다’라고
말하여라”(코란 112:1)라고도 하셨다. 사도께서도 이렇게 말씀하셨다. “옛날에 하나님이 한 분이시라고 말한 것 말고는
선행이라곤 전혀 한 일이 없는 사람이 있었다. 그가 죽으려 할 때, 그는 자기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내가 죽은 후에는
나를 화장하고 내 재를 모아 바람 부는 날 그 반을 바다에 뿌리고, 반은 지상의 바람에 흩뿌려서 내 흔적이 남지 않게 하여라.’
그가 죽고 유언이 집행되자마자, 하나님께서 공기와 물에게 명하여 받은 재를 부활의 날까지 보관하라고 하셨다.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들 가운데에서 일으키실 때, 하나님께서 그에게 왜 화장을 하라고 했느냐고 물으실 터인데, 그는 ‘오 주님, 당신을 뵙기
부끄러워서 그랬습니다. 저는 큰 죄인이니까요‘라고 대답할 것이고, 하나님은 그를 용서하실 것이다.”
진정한 합일은 어떤
것이 하나임을 주장하고, 그것이 하나인 것을 완전히 아는 데 있다. 하나님이 한 분이신 한, 그 분의 본질과 특질을 나누어 가질
자가 없고, 그 분의 행위를 대신할 자도 거기 동참할 자도 없으며, 유일신론자들이 하나님이 그런 분이시라고 주장하는 한,
하나임에 관한 그들의 앎을 합일이라고 부른다.
합일에는 세 종류가 있다. (1) 하나님과 하나님의 합일, 즉 하나님
자신이 하나이심에 대한 하나님의 앎, (2) 하나님과 그 분의 피조물의 합일, 즉 인간이 하나님이 한 분이심을 선포하라는
하나님의 계명과 인간의 마음에 합일을 창조하는 것, (3) 인간과 하나님의 합일, 하나님이 한 분이시라는 것에 대한 인간의 앎.
그러므로 인간이 하나님을 알 때, 그는 하나님이 한 분이심을 선언하고 하나님이 한 분이시어서 이원론을 허용할 수 없으며,
결합하시고 분리하실 수 없다는 것을 선포한다. 하나님이 한 분이시라는 것은 수(數)가 아니어서, 다른 수를 설정함으로써 둘이 될
수 없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유한하셔서 여섯 방향을 지니신 분이 아니시며, 또 하나님에게는 공간(우주-역주)이 없으시다.
하나님은 공간 속에 계시는 것이 아니니, 공간을 설정해야 할 필요가 없다. 또 하나님은 우연히 나타난 존재가 아니시니, 실체가
필요 없고, 자신과 같은 다른 것이 없으면 존재할 수 없는 실체도 아니시고, 움직임과 휴식이 나오는 자연적인 구조도 아니며,
어떤 틀이 필요한 영도 아니고, 사지로 이루어진 몸도 아니라는 것이다. 그 분은 또한 사물들 속에 내재(內在)하게 되지도
않으시나니, 그렇게 되면 그 분이 그것들과 같은 속성을 지신 분이 되시기 때문이다. 그 분은 또한 아무 것과도 관계가 없으시니,
그럴 경우 그것이 그 분의 일부여야 하기 때문이다. 그 분은 모든 불완전함에서 벗어나 계시고 모든 결함을 넘어서 계신다.
하나님은 필적할 만한 자가 없으시니, 하나님과 그 분의 피조물은 둘이다. 하나님은 자녀가 없으시니, 자녀를 낳으시면 필연적으로
하나님이 선조가 되실 것이다. 하나님의 본질과 속성은 변치 않는다. 하나님은 믿는 자들과 유일신론자들이 주장하고 하나님 자신이
그것들을 소유하고 계신 분으로 스스로를 묘사하셨던 그 완전함의 속성들을 부여받으셨다. 하나님은 이단들이 제멋대로 하나님께 부여한
그런 특성들에서 벗어나 계시다. 하나님은 살아 계시고 아시며 용서하시고 자비로우시며 의지와 권능이 있으시고 들으시고 보시고
말씀하시고 실재하신다. 하나님의 아심은 하나님 안에 있는 어떤 상태(hal)가 아니고, 하나님의 권능은 하나님 안에 견고하게
심어져 있는 것이 아니며, 하나님의 들으심과 보심은 하나님 안에서 분리되어 있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말씀은 그 분 안에서
나뉘어져 있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과 그 분의 특질들은 영원부터 존재한다. 인식의 대상이 하나님의 아심 밖에 따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은 자신이 원하신 것을 행하시며, 자신이 아신 것을 원하시나니, 어떤 피조물도 그것을 알지 못한다. 하나님의
명령은 절대적인 사실이며, 하나님의 친구들은 포기 외에 의지할 곳이 없다. 하나님은 선악을 홀로 미리 정하시는 분이시며,
소망하고 두려워할 만한 유일한 분이시다. 하나님은 모든 이익과 손해를 창조하시며, 그 분만이 심판하시고, 그 분의 심판은 완전한
지혜이시다. 누구라도 하나님께 이를 가능성은 전혀 없다. 낙원의 거주자들은 하나님을 볼 것이다. 동화(同化)는 인정할 수 없다.
“대면”(對面)과 “얼굴과 얼굴을 마주 하고 봄”과 같은 말은 하나님의 존재에 적용할 수 없다. 하나님의 성자들은 이 세상에서
하나님에 대한 관상을 누릴 수 있다.
하나님이 이런 분이심을 인정하지 않는 자들은 불신앙의 죄를 짓는 것이다. 나 알리
이븐 우트만 알-줄라비는 이 장의 서두에서 합일은 한 사물이 하나님을 확언하는 데 있으며, 그러한 확언은 앎이 없이는 할 수
없다고 말했다. 순니파는 참된 이해를 가지고 하나님이 한 분이심을 선포했다. 그들은 불가사의한 일과 독특한 행위를 보고는 그것이
스스로 존재할 수 없음을 인정했으며, 만물 속에 분명한 기원의 증거가 있음을 발견하고는 우주-땅과 하늘과 해와 달과 육지와
바다와 움직이고 쉬는 모든 것과 그들의 앎과 말과 삶과 죽음-를 존재하게 한 행위자가 있음이 분명하다고 인식했다. 이 모든
것에는 지은이가 없을 수 없다. 따라서 순니파는 두 명이나 세 명의 지은이가 있다는 개념을 거부하고, 자신들은 완전하고 살아
계시고 아시고 전능하시고 짝이 없는 단 한 분의 지은이로 만족한다고 선포했다. 하나의 행위에 적어도 한 명의 행위자가 필요하고,
하나의 행위에 두 명의 행위자가 있다는 것이 한 명이 다른 행위자를 의지하는 것이라면, 그 행위자는 틀림없이 확실히 하나이다.
여기서 우리는 빛과 어둠을 주장하는 이원론자들과 다르고, 또 야즈단(Yazdan: 아후라 마즈다-역주)과 아흐리만을 주장하는
조로아스터교 성직자들과도 다르며, 자연과 잠재성(quwwat)을 주장하는 자연철학자들과도 다르고, 일곱 개의 행성을 주장하는
점성학자들과도 다르며, 창조주들과 제작자들이 무수하다고 주장하는 무타질라파와도 다르다. 나는 「하나님께 합당한 것을
지킴」(Al-Riʻayat li-huquq)이라는 책에서 이 모든 허망한 견해를 간략히 논박했다. 나는 좀 더 설명해 주기를
바라는 사람들에게 이 책이나 고대 철학자들의 작품들을 말해 주어야 한다. 이제 나는 샤이크들이 이 주제에 대해 주신 가르침으로
돌아갈 것이다.
제1절
주나이드(Junayd)는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합일은 영원한 것을 시간 속에서 나온 것에게서 분리하는 것이다.”
즉, 너는 영원한 것을 현상의 한 지점으로 보거나, 현상을 영원한 것의 한 지점으로 보아서는 안 된다. 너는 하나님이
영원하시며, 너는 현상적이라는 것과, 너의 종(種)에 속한 것은 아무 것도 하나님과 관계가 없고, 하나님의 특질 중 어떤 것도
네 안에 섞일 수 없으며, 영원한 것과 현상적인 것 사이에는 동질성이 전혀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이것은 위에서 말한 바와
같이 영이 영원하다고 주장하는 자들의 주장과 반대이다. 영원한 것이 현상적인 것 속으로 내려온다고 믿거나, 현상이 영원한 것에
첨부되었다고 믿으면, 하나님의 영원성과 우주의 기원에 대한 증거가 아무 것도 남지 않으며, 이것은 유물론으로 나아간다. 현상의
모든 작용 속에는 합일의 증거들과, 하나님의 전능하심에 대한 증거들과, 하나님의 영원성을 확립하는 징표들이 있지만, 인간은
너무도 부주의해서 하나님만을 갈망할 수 없거나, 하나님을 기억하는 것만으로 만족할 수 없다. 후사인 이븐 만수르(알-할라즈)는
“합일의 첫 걸음은 분리(tafrid)를 소멸하는 것이다”라고 말한다. 분리는 우리가 결함(afat)에서 분리되었다는
선언이지만, 합일은 한 사물이 하나라는 선언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고립 속에서는 하나님과 다른 것을 주장할 수 있고, 이러한
특질은 하나님 외의 다른 것들의 것일 수 있다. 그러나 단일성(wahdaniyyat) 속에서는 하나님 외의 다른 것을 주장할 수
없으며, 단일성은 하나님 외의 어떤 것에게도 속할 수 없다. 따라서 합일의 첫 걸음은 (하나님에게) 짝이 있음을 부정하고,
혼합(mizaj)을 제거하는 것이니, (하나님께로) 가는 길에서 혼합은 등불을 들고 큰 길을 찾는 것과 같다.
후스리(Husri)는 이렇게 말한다. “합일에서 우리의 원리는 다섯이니, 현상을 부정하고, 영원을 긍정하며, 익숙한 것들을
떠나고, 형제들과 헤어지며, 알려지고 알려지지 않은 것을 잊는 것이다.” 현상을 부정하는 것은 현상이 합일과 어떤 관계가
있다거나, 현상이 하나님의 거룩한 본질에 이를 수 있다는 것을 부인하는 것이다. 영원을 긍정하는 것은, 내가 주나이드의 말을
논의하면서 이미 설명했듯이, 하나님께서 언제나 존재하셨다는 것을 확신하는 것이다. 익숙한 것들에게서 떠난다는 것은 초심자에게는
낮은 영혼의 습관적인 쾌락과 이 세상의 형상들에서 떠난다는 것이요, 숙련자들에게는 높은 상태와 영광스런 상태와 고상한 기적에서
떠난다는 것이다. 형제들을 떠난다는 것은 인간사회를 등지고 하나님의 나라를 향한다는 뜻이다. 하나님 외의 어떤 생각도 우리의
눈을 가리는 것이며 결함이기 때문이다. 인간의 생각이 하나님 외의 다른 것과 관련이 많을수록, 그는 그만큼 더 하나님에 대해
막혀 있는 것이니, 합일은 생각의 집중이지만, 하나님 외의 것에 만족하는 것은 생각이 산만한 징표라는 것은 보편적으로 인정하고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알려지거나 알려지지 않은 것을 잊는다는 것은 그것이 하나임을 말하는데, 합일은 인간의 지식이 그것에 대해
주장하는 모든 것을 부정하기 때문이다. 그들의 무지가 그것에 대해 주장하는 모든 것은 단지 그들의 앎에 반대되는 것이니, 무지는
합일이 아니고, 합일의 실상에 대한 앎은 사람이 주도한다는 것을 부정하지 않고는 얻을 수 없기 때문이다. 지식과 무지는 그
주도권 속에 존재한다. 어떤 샤이크는 이렇게 말한다. “후스리가 청중에게 말하고 있는 동안, 나는 잠이 들어, 하늘에서 두 명의
천사가 내려와 한 동안 그의 강의를 듣는 꿈을 꾸었다. 그 때 한 천사가 다른 천사에게 ‘이 사람이 말하는 것은 합일에 관한
이론이고, 합일 자체가 아니다’라고 말했다. 내가 잠에서 깨어 보니 그는 합일을 설명하고 있었다. 그는 나를 보고 말했다. ‘아
이렇고 이러하다네. 합일에 대해서는 이론적으로가 아니면 말할 수 없어.’” 주나이드는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합일은 이것이니,
우리가 하나님의 손에서 어떤 인물(shakhs)이 되는 것인데, 그 인물은 하나님께서 자신의 전능하심 속에서 결정하신 바에 따라
하나님의 명령이 그 위로 지나가는 그런 인물이다. 또 합일은 우리가 하나님의 단일성이라는 바다에 잠겨, 하나님의 단일성의 실상에
참으로 가깝게 흡수되어 인간이 하나님을 부르고 하나님께서 그에게 대답하시듯이 자아가 소멸되고 죽어서, 감각과 행위에 대해
사라지는 것이니, 하나님께서는 자신 안에서 자신이 자신에 대해 원하시는 것을 이루시기 때문이다. 즉, 그의 마지막 상태는 그의
최초의 상태가 되고, 그는 자신이 존재하기 이전에 그랬던 것과 같이 되는 것이다.” 이 모든 것은 하나님 뜻 안에 있는
유일신론자는 더 이상 자신의 의지를 지니지 않으며, 하나님의 단일성 속에서 자신을 보지 않으므로, 그는 영원한 과거에 그랬던
것처럼 하나의 원자처럼 된다. 그 때는 합일의 계약이 만들어지고 하나님이 스스로 하신 질문에 대답하셨던 때인데, 그 원자는 단지
그 분의 말씀의 대상이었다. 코란 7:171.
인간은 그런 사람을 어떤 일에 부를 정도로 그에게서 무슨 기쁨을 느끼지
못하며, 그도 그들의 부름에 응할 정도로 누구에게 우정을 느끼지 못한다. 이 말은 인간이 하나님의 계시에 압도되어 인간의 특성이
소멸되고, 하나님께 완전히 포기하고 맡겨서 수동적인 도구가 되고, 아무 것도 느끼지 못하는 미묘한 존재가 되었음을 가리킨다.
그의 몸은 하나님의 신비의 저장고요, 그의 말과 행위는 하나님의 것이지만, 그는 자신의 모든 것을 의식하지 않으면서도 여전히
종교적 율법의 계명을 따라서 마침내 하나님의 증거가 확립되도록 한다. 사도께서 상승의 밤에 (하나님께) 가까이 가신 상태가
되셨을 때 그러했다. 사도께서는 자신의 몸이 파괴되고 자신의 인격이 해체되기를 원하셨지만, 하나님의 목적은 하나님 자신의 증거를
확립하시는 것이었다. 하나님께서는 사도께서 처해 있던 상태에 머물라고 명령하셨다. 그래서 사도께서는 힘을 얻고 자기 자신이
존재하지 않음으로 인해 하나님의 존재를 드러내셨다. 사도께서는 “나는 너희 중 한 사람과 같지 않다. 진실로 나는 내 주님과
함께 밤을 보내고, 그 분께서는 나에게 먹을 것과 마실 것을 주신다”라고 하셨고, 또 “나는 어떤 케루빔(cherubim)도
어떤 예언자도 나와 함께 있을 수 없는 상태에서 하나님과 함께 있다”라고도 하셨다. 사알 이븐 압달라는 이렇게 말했다. “합일은
이것이니, 하나님의 본질에는 앎이 있다는 것과, 그 본질은 이해할 수도 없고 이 세상의 눈에는 보이지 않지만, 믿음의 실상 속에
무한하고 이해할 수 없고 아무 실체 없이 존재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하나님은 내적으로나 외적으로나 다음 세상에서, 그 분의
나라에서 그 분의 권능 속에서 보일 것이다. 인간은 하나님의 궁극적인 본성에 대한 앎에서 가려져 있나니, 그들의 마음은 하나님을
알지만, 그들의 지성은 하나님께 이를 수 없다. 믿는 자들은 (영의) 눈으로 하나님을 볼 것이지만 그 분의 무한하심을 이해하지는
못할 것이다.” 이 말에는 합일의 모든 원리가 들어 있다. 주나이드는 이렇게 말했다. “합일에 관한 가장 고귀한 말씀은 아부
바크르의 이 말씀이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피조물들에게 하나님에 대한 앎에 이를 수 없음을 통해서가 아니면 하나님에 대한 앎에
이를 어떤 방법도 허락하지 않으셨으니, 하나님을 찬양하라.’” 많은 사람들이 아부 바크르의 이 말씀의 뜻을 오해하고서, 영지에
이를 수 없다는 것이 불가지론과 같은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것은 맞지 않나니, 할 수 없다는 것은 오직 존재하는 어떤 상태를
말하는 것이지, 존재하지 않는 상태를 말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죽은 사람은 살 수 없는 것이 아니지만, 죽어
있는 동안에는 살아 있을 수 없고, 소경이 볼 수 없는 것은 아니지만, 눈 먼 상태인 동안에는 볼 수 없다. 그러므로
영지주의자는 영지가 존재하는 한 영지를 얻을 수 없는 것이 아니다. 그 경우에 영지는 직관과 비슷하다. 아부 바크르의 말은 아부
사알 술루키와 스승이신 아부 알리 다까끄의 가르침과 결합되었는데, 그들은 첫 번째 단계에서는 영지를 얻지만 마침내는 영지가
직관적으로 된다고 주장한다. 직관적인 앎을 지닌 사람은 어쩔 수 없이 그렇게 되며, 그 앎을 버리거나 자신에게 끌어당기거나 할
수 없다. 그러므로 아부 바크르의 말에 의하면, 합일은 하나님의 피조물의 가슴 속에 있는 하나님의 행위이다. 쉬블리는 “합일은
유일신론자들이 하나(Oneness)의 아름다움을 못 보게 한다”라고 말한다. 합일이 인간의 행위라고 말하는데, 인간의 행위는
하나님의 계시를 일으킬 수 없으며, 계시의 실제 속에서는 계시를 일으키지 않는 것은 장애이다. 인간과 인간의 모든 특질은
하나님과 별개의 것이다. 만일 인간의 특질을 하나님의 것이라고 여긴다면, 인간 자신을 하나님이라고 여겨야 한다. 그러면
유일신론자와 합일과 하나(the one)라는 셋이 모두 서로 존재하게 하는 원인이 된다. 바로 이것이 그리스도교의
삼위일체설이다. 만일 하나님을 찾는 자가 어떤 특질로 인해 합일 안에서 자신을 소멸시키지 못하게 된다면, 그는 여전히 그 특질에
가려 있는 것이며, 그렇게 가려 있는 동안 그는 유일신론자가 아니니, 하나님 외의 모든 것은 허상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하나님
외에는 어떤 신도 없다”라는 구절의 해석이다. 여기서 저자는 앞에서 말한 이브라힘 알-카와스와 알-할라즈의 일화를 소개하고 있다.
샤이크들은 합일을 나타내는 말을 상세히 논의했다. 어떤 이들은 합일을 소멸이라고 하면서, 그것은 특질들이 존재하는 한 제대로
성취할 수 없다고 하고, 다른 이들은 합일에는 소멸 외에 어떤 특질도 없다고 말한다. 이것을 이해하려면, 결합과 분리의 비유를
이 문제에 적용해야 한다. 나 알리 이븐 우트만 알-줄라비는, 합일은 하나님께서 자신의 종들에게 계시하신 신비이며, 말로는 전혀
표현할 수 없고, 거창한 문구로는 더욱 표현할 수 없다고 단언한다. 그것을 설명하는 말이나 그렇게 하는 사람들이 하나님은
아니며, 합일 속에서 하나님 아닌 것을 긍정하는 것은 다신론을 주장하는 것이다.
출처: http://www.sirius.ne.kr/GNOSTICISM/F3_gnosticism.ht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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