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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東으로 온 월지족
월지(6) 東으로 온 월지족 그렇다면 감숙성 알타이산이 근거지인 월지족이 왜 중국의 북동쪽 河北지역에 있었나? 하는 궁금증이 생긴다. 고대 중국인들이 오랑캐라고 부른 이민족에 대하여 알아 보아야 한다. 중국인들은 중국땅으로 부터 사방에 있는 오랑캐를 東夷, 西戎, 南蠻, 北狄이라 불렀는데 서쪽 오랑캐인 서융과 북적을 합쳐 융적이라고도 하였다. 지금의 중국의 북서부 간쑤. 산시성 일대에는 예로부터 융적이라 불리는 유목민족이 살았다. 주나라시기 이후로 산서성과 하북성을 남북으로 하고 서쪽의 고원지대와 동쪽의 태행산맥 서북쪽에는 이들 융적의 활동이 강성하였다. 서쪽에서 온 유목민인 서융이 중국 하북지역으로 이동하여 활동하자 이를 융적이라 한 것으로 보인다. 서융에 대한 사서의 기록을 보면 “서융의 성질은 용감..
2023.03.20 -
동유럽 초고대문명 빈차문명Vinca culture(BC7000년)과 고대한국 신라와 가야
동유럽 초고대문명 빈차문명Vinca culture(BC7000년)과 고대한국 신라와 가야 https://www.youtube.com/watch?v=bJFpxaewX_Y
2023.03.20 -
드바라바티 실라(Dvaravati Sila)ㅣ드와라카 실라Dvaraka Sillaㅣ신라의 국가명의 어원?
드바라바티 실라(Dvaravati Sila)는 드바라카의 고마티 강(곰티 강)에서 얻은 실라 또는 산호석의 한 종류입니다. 드바라카는 구자라트의 잠나가르 구에 위치해 있으며 고마티 강 하구가 쿠치 만으로 흘러들어갑니다. 그 도시는 인도의 가장 서쪽에 있습니다. 고대 산스크리트 문학에서, 드바라카는 드바라와티라고 불렸고 그 나라의 7개 선사 도시 중 하나로 등록되었습니다. 그래서 고마티 강의 하구에서 얻은 실라 또는 돌을 드바라바티 실라라 하여 예배에 사용합니다. 드바라카 사일러스는 차크라(바퀴) 표시가 있는 산호이고 차크라 표시가 이 돌들의 가장 구별되는 특징이기 때문에 '차크라키타 사일라'라고 불립니다.[1][2] 하나님을 상징적으로 표현하는 것은 이미지가 아니라 상징입니다. 인도 예술은 압도적으로 상..
2023.03.07 -
동국통감 23ㅡ평강공주와 온달
신라 진지왕 2년, 고구려 평원왕 19년, 백제 위덕왕 24년, 정유년(丁酉年), 577년, 중국연호 진나라 선제 태건 9년 가을 7월 ○백제에서 사신을 보내어 진(陳)나라에 조빙하였다. 겨울 11월 ○백제에서 사신을 보내어 후주(後周)에 조빙하였다. ○고구려에서 사신을 보내어 후주(後周)에 조빙하니, 후주에서 왕을 책봉하여 개부의동삼사 대장군 요동군개국공 고구려왕(開府儀同三司大將軍遼東郡開國公高句麗王)으로 삼았다. 신라 진지왕 3년, 고구려 평원왕 20년, 백제 위덕왕 25년, 무술년(戊戌年), 578년 진나라 선제 태건 10년 ○백제에서 사신을 보내어 후주(後周)에 조빙하였다. 신라 진지왕 4년 · 진평왕 원년, 고구려 평원왕 21년, 백제 위덕왕 26년, 기해년(己亥年), 579년, 중..
2023.03.03 -
드바라바티 실라ㅣDvaravati sila
바퀴무늬가 있는 실라 sila 드바라바티실라 드바라바티 실라(Dvaravati Sila)는 고마티 강(곰티 강)에서 채취한 실라 또는 산호석의 일종이다. 드바라카(Dvaraka)는 구자라트 주 잠나가르 구에 위치한 도시로, 고마티 강 하구에 위치한다. 그 도시는 인도의 최서단에 위치해 있습니다. 고대 산스크리트어 문헌에서 드바라카는 드바라와티라고 불렸고 나라의 7개 선사 도시 중 하나로 등록되었다. 그리하여 고마티 강의 하구에서 얻은 실라 또는 돌을 드바라바티 실라라 하여 예배에 사용한다. 드바라카 사일러스는 차크라(바퀴) 마크가 있는 산호이며 차크라 마크가 이 돌들의 가장 구별되는 특징이기 때문에 '차크라키타 사일라'라고 불린다.[1][2] 신을 상징적으로 표현하는 것은 이미지보다는 상징에 의한 것이다..
2023.02.25 -
월지 토벌과 사망ㅣ월지왕의 해골은 흉노의 술잔이 되다ㅣ월지와 신라는 모계혈통으로 왕이 되다.
월지 토벌과 사망 묵돌 시절 월지는 흉노의 서방에 자리잡고 있으면서 당시 서역 나라들에게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었다. 당시 우현왕이 한나라와 소규모 전쟁을 벌인 이듬해인 기원전 176년(한나라의 효문제 시대), 묵돌과 효문제가 편지를 교환하였다. 묵돌이 보낸 다음의 편지에는 월지 토벌의 내용이 나타난다. “ 지금 작은 관리들이 약속을 깨트렸기 때문에[4] 그 죄를 물어 이번에 우현왕에게 그 벌로써 서쪽으로 월지를 토벌하게 하였소. 다행히 하늘의 가호로 단련된 정예 병사와 강건한 말로써 월지를 쳐부수어 이를 모조리 죽이거나 항복시키고 누란, 오손, 호게 및 그 인접 26개 국을 평정하여 이들을 모두 흉노에 병합하였소. 이리하여 각 유목민족은 합하여 한 집안이 되었고, 북쪽 지방은 이미 안정을 찾았소. ” —..
2023.02.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