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 9. 1. 00:38ㆍ세계고대문명/수메르·이집트,인도,시베리아,북미
하트셉수트
하트셉수트를 모사한 조각상.
Ma'atkara Hatshepsut-khenmetamun (진실한 영혼이신 라, 아문과 결합한 하트셉수트)
Hatshepsut حتشبسوت
(B. C. 1508 ~ B. C. 1458)
이집트 18왕조 5번째 파라오. 고대 이집트 신왕국 시대의 대표적인 여성 파라오다. (고대 이집트 '최초의' 여성 파라오는 아니다. 그녀 이전의 고왕국과 중왕국 시대 혹은 그 중간기에 몇 명의 여성 파라오가 존재했다. 물론 이때의 여성 파라오는 남성 파라오를 보좌하는 여성 파라오라는 의미가 아니고 독신 여성 파라오라는 뜻이다.)
1. 생애[편집]
기원전 1508년 투트모세(Thutmose) 1세와 정비 아흐모세의 사이에서 태어났다. 이복형제인 투트모세 2세와 결혼하였는데, 이는 후궁 무트네페르트의 소생이었던 투트모세 2세의 제위 계승권을 위하여 치러진 정략결혼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형태의 남매간의 결혼은 고대 이집트 전반에 걸쳐 유행하였는데, 이집트 세계관에서는 파라오는 남녀 한쌍이어야 했기 때문이다. 자세한 내용은 파라오 항목 참조.즉 하트셉수트가 파라오 투트모세 2세와 결혼한 것이 아니라 남편을 파라오로 만들어 줄 수 있는 여자인 하트셉수트와 결혼했기 때문에 투트모세 2세가 파라오가 된 것이다. 이 때문에 투트모세 2세의 재위 기간에도 일반적인 왕비 이상의 권위와 권력을 가졌을 것으로 추측되며, 기원전 1479년 투트모세 2세가 사망하자 정치 일선에 나선다.
투트모세 2세가 죽고 후계자인 투트모세 3세가 너무 어려서 대신 하트셉수트가 파라오가 된다. 이는 이집트에는 아이신기오로 도르곤처럼 섭정을 명목으로 집권하는 식의 제도화된 섭정제도가 없었기 때문이기도 하고 또 투트모세 3세가 너무 어려 그렇게 오래 파라오 자리를 비워둘 수 없었기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이때 투트모세 3세의 나이는 대략 2살에서 7살 사이로 추정되는데 2살 설이 가장 유력하다. 이집트에서 파라오라는 자리가 어떤 위치에 있는지를 생각한다면 하트셉수트가 파라오를 대행하는 것 외에는 방법이 없었다.
이 때 하트셉수트는 수염을 붙이고 남장을 하는 등 남성 파라오로서의 복장을 하였다. 파라오는 남자만 될 수 있기에 남장을 했다는 잘못된 사실이 퍼지기도 했지만 사실이 아니다. 독신 여성 파라오가 남자 파라오의 역할을 같이 겸임하기 위해서 남자 복장을 했을 뿐이다.[1] 물론 그 당시에도 대부분의 국가들이 남자 중심으로 권력이 돌아갔던 걸 보면 이집트의 왕위계승법이 꽤 특이했기 때문에, 현대인들이 오해한 것.
하트셉수트는 투트모세 1세로 변한 아문 신이 왕비 아흐모세와 동침하여 태어났다는 탄생 설화를 창작하였으며, 이름에 '아문 신과 결합한' 이라는 뜻의 '켄메트-아문khenmetamun' 이라는 칭호를 넣었다. 이런 탄생 설화 창조는 파라오 들에게 흔한 일이었고 특별히 정통성 문제가 있어서 이렇게 한 것은 아니다. 그냥 이전의 다른 파라오들이 하던대로 전통을 따랐을 뿐이다.
여성이기 때문에 이시스 여신마냥 따뜻한 모성으로 왕국을 통치한 부드러운 파라오라고 기대하는 사람도 있으나...전혀 아니었다. 4~ 6차례에 걸친 군사 원정을 통해 알 수 있듯 필요하면 전쟁을 전혀 마다하지 않았다. 심지어 치세 초반에는 직접 출전하기도 했다고 할 정도니 꽤나 여장부였던 듯 하다. 이를 바탕으로 힉소스의 잔재를 씻어내고 오리엔트 일대에 다시금 이집트의 위상을 높였으며, 주변국과의 무역에 힘써 많은 이득을 얻어냈다. 이집트 역사 전체를 통해서 가장 성공적인 치세를 이룬 여인으로 평가받고 있다. 전쟁과 무역의 상대는 누비아, 레반트, 시리아, 그리고 소말리아 근처로 추정되는 황금왕국 푼트 등지였다.
제 18왕조 최대의 번영을 이룩한 시기라고 해석되기도 하며, 그 증거로 제세르 제세루(장엄중의 장엄)[2]이라고 불리우는 하트셉수트의 거대한 장제전이 있다. 멘투호테프 2세의 장제전 옆에 세워진 하트셉수트의 거대한 장제전은 암벽을 깎아 아문 신의 성역을 조성하고, 아누비스 예배당과 하토르 성소를 비롯한 각종 제실, 그리고 자신의 탄생 설화와 푼트 원정 등을 부조로 남겨 화려하게 장식하였다.
하트셉수트의 장제전 데이르 엘 바하리
남으로는 누비아, 북으로는 지금의 시리아 일대를 포함한 유프라테스 강 유역까지 석권하여 훗날 고대 이집트의 나폴레옹이라 불리게 되는 투트모세 3세의 정복 사업을 뒷받침한 경제적 기반도 하트셉수트가 축적한 것으로 해석하기도 한다.
기원전 1458년 1월 16일 사망하였다. 신왕국 시대 파라오들이 그랬듯이 그녀 또한 왕가의 계곡에 묻혔으며, 장제전 암벽 바로 너머의 KV20이 그녀의 무덤이다.
21세기 들어 그녀의 것으로 추증되는 미이라가 발견되었다. 미이라는 꽤 보존상태가 좋은 채로 남아 있어서 165cm의 키에 살짝 살집이 있는 체형의 여성이라는 것이 밝혀졌다. 연구 결과 직접적인 사인은 50대에 즈음 암의 일종인 골종양이 전신으로 퍼졌기 때문으로 밝혀졌으며, 그 외에 관절염, 치주염을 비롯한 충치가 발견되었다.
2. 투트모세 3세와의 관계[편집]
룩소르 북쪽, 아비도스에 있는 세티 1세의 장제전에는 제 1왕조를 세운 나르메르에서부터 19왕조의 2-3대 파라오인 세티 1세와 람세스 2세까지 76명의 역대 파라오들의 이름과 재위기간이 기록된 '아비도스 왕명표'가 있다. 그런데 여기에는 유일신 아텐 신앙을 중심으로 개혁을 했던 아케나톤과 그 후계자인 투탕카멘, 그리고 하트셉수트의 왕명이 누락되어 있다. 또 하트셉수트가 세운 기념물이 파괴되었고 이집트인들이 가장 두려워하는 행위인 '이름의 삭제'가 행해져서 하트셉수트가 세상을 떠난 뒤 왕위를 회복한 투트모세 3세가 자신을 쩌리로 만든 하트셉수트에 대한 보복으로 기록말살형에 처한 것이라는 이야기가 한 때 정설처럼 받아들여졌고 심지어 지금까지도 여러 매체에서 이 설을 진실처럼 얘기하고 있다.하지만 고대 이집트에 대한 연구가 계속되어 이집트학의 깊이가 깊어지고 여러 기록물들이 추가로 계속 발견되면서 투트모세 3세가 하트셉수트를 미워하여 기록을 말살했다는 설은 이집트 학계에는 거의 죽은 학설이 되었다. 대략적으로 다음과 같은 사항들이 두 사람의 불화설을 부정하고 있다.
- 투트모세 3세는 하트셉수트가 직접 낳은 딸인 네페루라의 남편인데다가 그녀 자신의 조카이기도 했다. 즉 혈연으로 단단히 연결되어 있었다.
- 투트모세 3세는 정당한 후계자였고 하트셉수트는 정당한 대행자였다. 투트모세 2세의 외아들인 투트모세 3세가 아버지의 자리를 물러받는 것은 너무 당연한 권리라 여기에 대해 다른 사람이 이의를 제기하기 어렵듯 하트셉수트는 투트모세 3세의 가장 정당한 대행자라서 역시 여기에 대해 반발이 나오기 어렵다. 정치적으로 정당한 권리를 가진 사람이 반드시 해야할 일을 할 경우 대개 심한 반발이 나오지 않는다.
- 투트모세 3세로서도 하트셉수트가 왕권을 대행한 것은 조선의 정희왕후 윤씨가 성종의 수렴청정을 했던 것처럼 일선에 나서기 이전 보호자로서 그 기반을 마련해 준 것으로 받아들일 수 있다는 점이다. 투트모세 2세가 사망했을 당시 투트모세 3세는 너무 어렸기 때문에 반드시 정치를 대신할 자가 필요했는데 이걸 하트셉수트가 맡아하는 것이 투트모세 3세 자신에게도 가장 유리할 뿐만 아니라 너무 당연한 것이다. 그럼 정비인 하트셉수트를 놔두고 후궁인 생모가 대신할까? 아니면 단종이나 건문제 꼴 나라고 숙부가 대신할까?
- 투트모세 3세가 어느 정도 자라자 하트셉수트가 이렇다 할 방해공작 같은 거 없이 자신의 공통 통치자로서 자리를 마련해 준다. 투트모세 2세 사후 한동안 하트셉수트의 이름만 나오던 기념비나 기념벽화에 투트모세 3세가 십대 중반이 될 즈음부터 두 사람의 이름이 동시에 나타나기 시작한다. 두 사람의 공동 통치가 실제로 시작되었다는 뜻으로 봐야 할 것이다.
- 공동 통치 22년째에 하트셉수트가 죽었는데, 만약 하트셉수트와의 사이가 나빴다면 당연히 훼손되었어야 할 그녀의 장제전과 무덤이 멀쩡히 남아있다. 하트셉수트의 무덤이 훼손된 것은 도굴꾼들에 의한 것으로 의도적 훼손은 전혀 보이지 않는다.
- 투트모세 3세가 하트셉수트를 그렇게 증오했다면 당연히 그녀를 도와 정사를 봤던 여러 중신들에 대한 숙청이 있어야 할텐데 그런 흔적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는다. 하트셉수트 시대의 중신이 그녀 사후 그대로 투트모세 3세의 정사를 보좌하고 있는 기록만이 존재할 뿐이다.
- 하트셉수트의 이름이 지워지는 시기는 그녀 사후 20년이 지난 시점으로, 투트모세 3세가 아득바득 분노의 칼을 갈았다면 20년 동안이나 기다릴 이유가 없다.
- 투트모세 3세의 두 번째 정비로 그의 후계자인 아멘호테프 2세를 낳은 여인은 '라의 사랑을 받는 하트셉수트[4]'이다. 만약 투트모세 3세가 하트셉수트를 쌍심지를 켜고 증오하고 있었다면 자기 배우자의 이름에 하트셉수트라는 이름이 들어가는 걸 좋게 생각했을리 만무하다.[5]
- 투트모세 3세의 장제전이 하트셉수트의 장제전과 너무 가깝게 붙어있다. 만약 투트모세 3세가 하트셉수트를 찬탈자로 여겼다면, 장제전을 때려부수진 못할망정 자신의 장제전과는 최대한 떨어뜨려 두었을 터인데 두 장제전은 서로 이웃하고 있다.
하트셉수트 장제전 옆에 붙어있는 잔해들 중 앞부분은 멘투호테프 2세의 장제전이고, 뒷쪽이 투트모세 3세의 장제전이다. 마지막으로 하트셉수트의 기념물 중 파괴되지 않고 멀쩡하게 남아 있는 기념물이 너무 많아서, 하트셉수트를 겨냥한 파괴행위가 진짜 있었는지도 의문스럽다. 여기에 건축사업을 시행할 능력이 없었던 후대의 파라오들이 전대 파라오들의 기념물들에 새겨진 이름을 파내고 자신의 이름을 새겼음을 상정한다면[6], 투트모세 3세가 악의적으로 용의주도하게 하트셉수트의 흔적을 삭제했다고 보기는 어렵다. 미워서 이름을 지운 게 아니라, 건물을 다시 짓기 버거우니 그냥 이름만 지우고 재활용했다는 얘기.
왕명표 문제도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의 역사가인 마네토가 편찬한 왕명표에 그녀의 이름이 남아 있으므로, 아비도스 왕명표에서는 공동 통치를 펼쳤기 때문에 투트모세 3세의 이름만을 기입한 것이라고 추측할 수 있다.
훗날 하트셉수트 장제전과 멘투호테프 2세 장제전 사이에 건립된 투트모세 3세의 장제전은 지반이 침하되어 공중분해되었고, 카르나크 신전에 바로 이웃하여 있던 하트셉수트와 투트모세 3세의 오벨리스크 중 투트모세의 것만 뜯겨져 나가 터키 이스탄불의 히포드로메에 장식되어 있다. 범인은 로마 제국의 테오도시우스 대제.
3. 트리비아[편집]
엘렉트라 콤플렉스 의혹이 있다. 그녀의 무덤인 KV20은 본래 그녀의 아버지 투트모세 1세의 무덤으로 만들어졌던 것인데, 하트셉수트가 후일 그 무덤을 증축하고 자신의 장제전을 그 앞에 건축함으로써 아버지와 합장되기를 원했다는 것. KV20에서 하트셉수트와 투트모세 1세의 관이 함께 발견되면서 그녀의 파더콤 의혹은 더욱 증폭되고 있다...만 이건 좀 아니라고 생각했는지 투트모세 3세가 KV38로 투트모세 1세를 이장함으로써 파더콤 하트셉수트의 계획은 실패로 돌아가고 말았다.
데이르 엘 바하리에 있는 하트셉수트의 장제전은 하트셉수트의 딸 네페루라의 가정교사였던 센무트Senmut가 건축하였다고 알려져 있는데, 그가 네페루라를 무릎 위에 안고 있는 석상이 자주 출토되는가 하면, 하트셉수트 장제전 바로 밑에는 센무트의 무덤도 있다. 실로 상당한 권력을 손에 쥐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를 기반으로 센무트가 하트셉수트의 연인이었다고 해석하는 학자들도 있다.
모세와 관련이 있다는 의견도 있다. 주로 출애굽 전기설, 즉 '투트모세 3세의 아들인 아멘호테프 2세가 출애굽 당시의 파라오일 것이다'라는 의견 쪽에서 많이 나오는데, 그들의 주장에 따르면 아기 모세를 발견한 이집트의 공주가 바로 하트셉수트라는 것이다.[7] 그러나 어디까지나 일방적인 추측에 불과하기 때문에 확언은 어렵다.
4. 대중매체에서[편집]
사토나카 마치코의 순정만화 '바다의 오로라' 이집트 부분에 이집트 여왕으로 등장한다. 여기서는 투트모세 3세와 사이가 상당히 별로인 것으로 나온다. 국내에는 80년대 초반에 '에덴이여 영원히'라는 제목의 해적판으로 나온 적이 있다
나가오카 요시코의 순정만화 '나일 강변의 이야기' 2권에 하트셉수트와 투트모세 3세가 나온다. 하트셉수트는 굉장히 현명하고 사려깊은 여인으로 나오지만 투트모세 3세는 자기 생모를 하트셉수트가 죽였다고 오해하고 있는 것으로 나온다. 하트셉수트 사후 투트모세 3세의 오해를 알아차린 신하들이 이 오해를 풀어준다. 국내에는 뜬금없이 람세스 3부라는 제목으로 나왔다. 람세스 1, 2부는 바로 왕가의 문장 해적판.
퇴마록 세계편 '세크메트의 분노' 편에서, 하트셉수트 장제전의 하토르 성소 지하에서 세크메트의 성소가 발견되었다는 식으로 잠깐 언급되고 넘어간다. 데이르 엘 바하리의 하토르 성소도 바로 옆 멘투호테프 2세 장제전을 발굴하는 과정에서 드러났는데... 설마?
2000년 프랑스에서 만든 그림자 애니메이션 프린스 앤 프린세스의 무화과와 소년 에피소드에 이집트의 여왕으로 등장한다.
[1] 여기를 참고 파라오에 대해서 뿐만 아니라 하트셉수트와 투트모세 3세의 불화설에 대해서도 잘 설명해 주고 있다.[2] 훗날 콥트교 수도원이 되는데, 이 때문에 북쪽 수도원이라는 뜻의 데이르 엘 바하리라는 지명이 붙게 된다.[3] 사실 충치는 당시 이집트 사람들의 고질병이기도 했다. 사막지대에서 주식인 빵 만드는 반죽에 모래가 들어가는 일이 많았기 때문이다.[4] Hatshepsut-Meretra 하트셉수트-메레트라[5] 실제로 고대 이집트 사람들은 사람을 구성하는 다섯 가지 요소들 중 하나가 이름이라고 생각할 정도로 이름을 중요하게 여겼다.[6] 이런 짓은 람세스 2세가 특히 유명한데, 아부심벨 대신전을 비롯한 많은 건축물과 기념물을 남기는 데 만족하지 않고 선대 파라오들의 유산에 자신의 이름을 깊이 새겨넣었다. 온몸에 람세스 2세의 이름이 도배된 아메넴헤트 3세의 스핑크스가 대표적이다.[7] 출애굽은 모세가 80대였을 때의 일인데, 전기설에 의거한 출애굽 당시의 파라오 아멘호테프 2세 치세로부터 80년을 역산하여 모세가 아기였을 때를 추정해 보면 투트모세 1세의 치하가 된다. 그 투트모세 1세는 하트셉수트의 아버지인바, 결국 이스라엘인들의 장자를 학살한 파라오는 투트모세 1세이며 그의 딸 하트셉수트가 학살을 피해 강가에 떠내려보내진 아기 모세를 발견해 길렀다는 이야기가 된다.
https://namu.wiki/w/%ED%95%98%ED%8A%B8%EC%85%89%EC%88%98%ED%8A%B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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