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후 김일제ㅣ기련산맥의 왕국 휴도왕의 태자ㅣ신라왕실의 시조

2022. 11. 21. 00:12History of Korea/신라,백제,고구려,고려

김일제 묘에 분향하다

김일제의 후손들이 한 왕실에서 실권을 잡고 있던 100여년 동안은 후손들의 참배가 거창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 후손들은 이후 지리멸렬해졌고, 2000여년이 지난 지금은 내놓고 이 묘를 찾을 후손이 있을 것이라고는 생각되지 않았다. 오히려 아직 이렇게 덩그러니 남아 있는 것만 해도 기적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김일제의 묘 꼭대기는 사람들이 많이 오르내린 듯 잔디가 벗겨져 사방으로 흙색의 붉은 속살을 드러내고 있었다. 동서남북 사방으로 뱀이 기어가는 듯 여러 갈래의 산책로 같은 길이 나 있었다. 묘에 오르지 못하도록 계획적으로 심었는지 알 수 없으나, 묏등 전체에는 무릎까지 오는 키 작은 가시나무가 고르게 덮여 있었다. 이곳에서 밀과 옥수수를 재배하고, 사과 과수원을 하고 있는 장지염(張志廉·50)씨는 할아버지대부터 3대째 농사를 짓고 있다고 했다.
장씨는 “작년 2월인지 3월인지 기억이 잘 안 나지만 만주 요령성에 있는 60∼70대의 할아버지 두 사람이 찾아와 자신들이 김씨라고 하면서 묘에 절을 하고 갔다”고 말했다. 그 외에 이 묘를 찾는 사람은 아직 본 일이 없다고 했다. 그런데 김일제 묘에는 남쪽에 있어야 할 묘비가 보이지 않았다. 답사팀은 처음에는 묘비가 없는 줄 알았다. 그렇지만 적어도 무릉에 배장될 정도의 묘라면 묘비가 없을 수 없다는 생각이 들어, 여러 사람이 나서서 묘비 수색 작업을 벌였다. 아니나 다를까. 묘의 남쪽 정면에 있을 것이라고 짐작하고 무작정 과수원 속으로 20여m 들어갔더니 묘비가 있었다. 묘비는 어른 키만한 배나무 사이에 들어앉아 있어 눈여겨 찾지 않는 한 발견하기 어려운 상태였다. 배밭 주인인 50대 아주머니가 뛰어와 허락도 없이 들어갔으니 고발하겠다며 심하게 투덜대는 것을 달래느라 한참 고생했다.
답사팀 중 김씨 성을 가진 일행이 인사라도 올리고 가자고 제안했다. 이번 여행의 중요 목적이 김일제의 묘를 찾는 것이었으므로 모두가 찬성했다. 그러나 배나무 과수원 속에 있는 묘비 앞에는 차례를 지낼 손바닥만한 공간도 없었다. 하는 수 없이 묘의 동쪽 넓은 터에다 말리고 있는 밀짚을 약간 걷어내고 간단한 차례상을 차렸다.
한국에서 만든 순수한 우리 향을 피우고, 전남 승주에서 신광수(申珖秀)씨가 직접 만든 작설차를 올렸다. 제주는 답사팀 팀장인 김세환(金世煥·70)씨가 맡았다. 신라 김씨 계열의 의성 김씨(義城金氏)인 김세환씨는 답사를 나서기 전 김알지가 탄강했다는 경주 계림을 찾아서 중국의 김일제 묘를 찾으러 간다고 고유제를 올릴 만큼, 김씨의 뿌리를 찾는 작업에 애착을 가지고 있었다. 후배들에게 보이지 않으려는 눈치였으나 그는 차례를 지내는 동안 눈시울을 붉히고 있었다.

 

1000km의 사막, 河西走廊

그러면 과연 김일제는 역사에 어떻게 등장하고 있을까. 답사팀은 그 역사의 현장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먼저 김일제라는 인물이 태어났던 기원전 2세기경 김일제를 둘러싼 내외 사정을 짚어볼 필요가 있다.
김일제의 아버지 ‘휴도’가 흉노의 왕으로 살고 있던 땅은 지금 서안 북쪽 땅인 무위(武危)의 언지산 (焉支山)과 돈황(敦煌)의 삼위산(三危山)이 있는 감숙성(甘肅省) 지역이다. 휴도가 이웃나라 왕인 곤사왕 (昆邪王)의 꾐에 빠져 죽고 일제와 동생 윤(倫), 그의 어머니 알지(閼氏)가 한나라 곽거병에게 포로로 잡힌 곳이 바로 삼위산이다.
동쪽 아래에 있는 한(漢)나라 측에서 보지면 이 지대는 오초령에서 시작하여 서쪽으로 신강에 이르기까지 길이가 1000km에 이르며, 그 폭은 40∼100km나 되는 광활한 땅이다. 중국 사람들은 이 지역을 계곡으로 보았던지, 황하의 서쪽을 달리고 있는 긴 복도라는 뜻으로 ‘하서주랑(河西走廊)’이라고 부른다.
비록 복도라고 부르지만 결코 좁지 않은 광활한 지대다. 좌우가 험악한 산맥과 사막인 탓에 이 기나긴 지대말고는 사람이 다닐 만한 길이 없다. 따라서 이 지대를 거치지 않고서는 서역으로 갈 다른 길이 없는 것이다.
사막지대로 이어지는 이 땅은 황량하기 짝이 없지만, 해발 4000∼5000m인 기련산맥(길이 800km)에는 3000여개의 빙하가 2000km2의 거대한 얼음 호수를 형성하고 있어 멋진 대비를 이룬다. 여기서 녹아 흘러내린 물이 곳곳에 강과 호수를 이루고 넓은 오아시스를 형성한다.
이 오아시스 지대에 넓은 초원이 펼쳐져 목축이 번성하고, 비옥한 땅이 개간돼 농업이 발달해 감숙성의 곡창지대로 군림할 수 있었다. 이곳은 또한 동서무역의 관문으로 이곳을 지배하는 민족이라야 중원 땅을 부리는 힘을 가질 수 있었다. 그래서 일찍부터 이 지역을 차지하기 위한 쟁탈전이 끊임없이 벌어졌다.
진(秦)나라는 감숙성 천수(天水) 땅에서 나라를 일으킨 뒤 섬서성 북서쪽에 있는 이곳 하서주랑을 차지함으로써 천하통일의 기반을 닦을 수 있었다. 진시황제가 죽고 나자 간신들은 시황의 태자 부소(扶蘇)를 살해하고, 동생 호해(胡亥)를 내세워 천하를 주무르다 한고조인 유방에게 나라를 뺏긴다.
어쨌든 휴도왕 세력은 이곳에 근거지를 두고 계속 한나라를 넘보았다.
한편 한나라를 세운 한 왕실은 이 하서주랑을 손에 넣지 않고는 하루도 편한 날을 보낼 수 없었다. 그야말로 눈엣가시 같은 땅이었다. 대대로 중원을 통치한 이들은 이곳에 사는 종족을 야만시해 흉노족이라고 낮춰 불렀다. 흉노의 생활과 풍속은 한족과는 판이했다. 초원과 물을 찾아 이동해 다니면서 털로 짠 파오(천막)생활을 했기 때문에 생활은 늘 전투 태세였고, 무엇보다 말을 가까이했기에 기동력이 뛰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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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무제의 부인인 위황후 언니의 아들로 태어난 이가 곽거병이다. 그는 이모부인 무제의 총애를 받았다. 18세의 어린 나이에 시중이 되었으며, 위왕후의 형제인 외삼촌 위청 장군을 따라 흉노정벌에 나서 혁혁한 무공을 세우게 된다. 곽거병은 먼저 광대한 초원지역인 언지산(焉支山)을 공격한 후, 이어 기련산 너머로 달아난 흉노를 쳐부수어 4만명 이상의 흉노를 포로로 사로잡는 대전과를 올렸다.
당시 광활한 하서지방 중에서도 노른자위 땅을 다스린 통치자는 곤사왕(昆邪王)과 휴도왕(休屠王)이었다. 한나라의 정벌군에 계속 밀리던 곤사왕은 흉노의 천자(天子)인 선우의 질책이 두려워 일제의 아버지인 휴도왕을 설득해 투항키로 한다. 그러나 휴도왕은 투항을 거부하고 전쟁준비를 한다. 그러자 곤사왕은 휴도왕을 꾀어내 죽여버리고 4만명의 무리와 함께 곽거병에게 항복하고 만다. 곽거병은 항복한 흉노군을 이끌고 장안으로 개선했는데 10만의 대군단이었다고 사마천의 ‘사기(史記)’는 전한다.

 

‘한서(漢書)’의 김일제 전(傳) ㅣ김일제(金日磾, BC 134~BC 86)

―칭찬해 이르기를(贊曰), 김일제는 이적(夷狄)의 사람으로 그의 모국을 잃고 한의 궁중에 매인 노예였으나 임금을 독실하게 공경하고 타일러, 스스로 충성스러움과 믿음이 나타나 공적에 의해 상장(上將)이 되고 나라를 후사에 전해 자손은 대대로 충효로 이름나고 7대 왕에 걸쳐 궁중을 돌본 일, 어찌 그리 성했는고. 본시 휴도왕이 금인(金人)을 만들어 제천(祭天)한 까닭으로 김씨의 성을 주었다고 한다.

―김일제의 자(字)는 옹숙(翁叔), 본래 흉노 휴도왕의 태자였다. 일제는 아버지가 항복하지 않고 죽었으므로 어머니 알지줂閼氏줃와 동생 윤(倫)과 함께 한관에게 몰수돼 황문(黃門)에 옮겨져 말을 길렀다. 이때가 나이 14세였다. 그 뒤 무제는 잔칫날에 말을 검열하였다. 거기엔 후궁의 여인들이 가득히 모여 있었다. 일제 등 수십인이 차례로 말을 끌고 어전 아래를 통과했는데 여인들을 힐끔힐끔 훔쳐보는 자가 많았다. 그런데 오직 일제는 궁녀들을 훔쳐보지 않았다. 일제는 키가 8척2촌, 용모는 엄숙하고 끌고 있는 말 또한 살지고 훌륭했으므로 임금이 기이하게 생각하고 물어보니 사실대로 대답했다. 임금은 기특히 여기고 즉일로 목욕시키고 의관을 주어 마감(馬監)으로 임명했다. 곧 시중부마도위 광록대부(侍中附馬都衛 光祿大夫)에 올랐다.

일제는 임금에게 가까워진 이래 전혀 과실이 없어 임금의 신임과 사랑을 받아 상을 받은 것이 누천금이나 되었다. 임금이 밖에 나갈 때는 함께 타고 갔으며 안에 있을 때는 좌우에서 모셨다. 주위에서 “폐하가 망령이 들어 한 오랑캐의 애새끼를 얻어 도리어 귀하고 중하게 여긴다”고 수군거리니 임금은 그 소리를 듣고 더욱 후하게 대하였다.
일제의 어머니는 두 아들(일제와 윤)을 가르침에 매우 법도가 있어 임금이 이 말을 듣고 가상히 여겼다. 병으로 죽자 어명으로 감천궁(甘泉宮)에 초상화를 그리게 하고 ‘휴도왕 알지(休屠王閼氏)’라고 표제를 붙였다. 일제는 그 초상을 뵐 때마다 예배하고 쳐다보고 눈물을 흘리고 난 뒤 걸음을 옮겼다.

 

※ 후한시기 : 1척 = 23,7 cm 1촌 = 1척의 1/10 / 8척2촌= 23.7*8+2.37*2 =194.3c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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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후 벼슬을 받다

―일제가 임금은 좌우에서 모신 지 수십년에 이르렀다(이 사이에 일제는 임금을 암살하려 하는 자를 잡아내 더욱 임금의 신뢰를 받았음). 임금은 일제에게 궁녀를 주었으나 절대로 가까이 하지 않았다. 임금이 그의 딸을 후궁으로 삼고자 했으나 승낙하지 않았다. 그의 독실과 근신이 이와 같아 임금은 더욱 기이하게 여겼다.
임금이 앓아 눕게 됐다. 무제는 모하라(임금을 암살하려 한 자)를 토벌한 공으로 일제를 ‘투후(?侯)’에 봉할 것을 유언으로 남겼으나 일제는 무제에 이어 즉위한 임금(昭帝)이 어리므로 봉을 받지 않았다. 어린 임금을 보조한 지 1년 쯤 지나서 일제는 앓아 눕게 되고 병이 깊어졌다. 대장군 곽광이 임금께 진언하여 일제는 드러누워서 열후(列侯)의 인수(印綬)를 받았다. 하루가 지나서 죽었다(나이 50세로 추정). 장례에 필요한 물건을 주고 묘지를 주어 경차와 무장병을 딸려 장송하니 군대의 진을 펴고 무릉에 이르렀다. 시호를 경후(敬侯)라고 하였다.

―일제의 두 아들 상(賞)과 건(建)은 원래 시중(侍中)이 되고 소제(昭帝)와 나이가 비슷해 함께 기거했다. 상은 봉거도위(奉車都衛)로, 건은 부마도위(附馬都衛)가 되었다. 상이 투후를 계승하여 두 개의 인수(印綬)를 차게 돼 임금이 곽장군에게 이르기를 “김씨 형제가 모두 두 개의 인수를 달게 하면 안 됩니까” 하고 물으니 곽광이 대답하기를 “상은 아버지의 벼슬을 이은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했다. 그때 나이 모두 8, 9세였다.

선제(宣帝)가 즉위한 뒤 상은 태복(太僕)이 됐다. 그런데 곽광 장군이 모반의 낌새를 보이자 상서하여 곽씨의 딸인 부인과 이혼을 했다. 임금도 이를 애처롭게 여겼으며 이로 인해 상은 연좌되지 않았다. 원제(元帝) 때 광록(光祿)의 훈(勳)을 받고 죽었으나 아들이 없어 그 나라는 없어졌다. 선제에 이어 제위에 오른 원제(元帝) 초에 일제의 차남인 건(建)의 손자 당(當)을 투후로 봉하여 일제의 뒤를 잇게 했다. 다시 당의 아들인 성(星)이 투후를 계승한다.


정리하자면 일제는 한무제로부터 김이라는 성을 받고 가장 아끼는 신하가 된다. 무제를 암살하려는 자를 무제 앞에서 격투 끝에 체포한 공으로 한나라 제후국의 왕인 ‘투후’라는 벼슬까지 받는다. 일제의 아들 상(賞)도 투후가 되나 일찍 죽고, 후에 5대손인 성(星)까지 투후 벼슬을 받아 제후국의 왕이 되기에 이른다는 것이다.

신라의 김이 김일제의 김인가?

그런데 여기서 김일제 일가에 자주 등장하는 ‘투후’라는 이름은 놀랍게도 신라 30대 왕인 문무왕 비문에서 다시 나타난다. 지금 경주국립박물관에 남아 있는 문무왕의 비석은 윗부분 전체가 없어져버렸고 비의 아래 둥치만 남아 있다. 현재 탁본으로 남아 있는 비문의 글자는 원래 비문의 일부밖에 되지 않지만 중요한 것은 문무왕의 계보가 완전치는 못하다 하더라도 뚜렷하게 남아 있어서, 신라 왕가의 가계도를 살펴보는 데 중요한 열쇠가 된다는 점이다.
자취를 감추었던 문무왕비가 다시 발견된 것은 1796년(정조 20년)에 밭을 갈던 농부에 의해서다. 이는 당시 경주부윤을 지내던 홍양호(洪良浩·1724∼1802년)에게 보고됐고, 홍양호는 이를 탁본해 당시의 지식인들에게 공개함으로써 세상에 알려졌다. 이 비문은 발견 당시에 이미 글자의 반수 이상이 심하게 마모돼 완전하게는 읽을 수 없다. 그러나 전체적인 윤곽은 짐작할 수 있다. 이 비문에서 중요한 것은 문무왕의 출자(出自)가 보인다는 점이다. 이에 대해서는 이미 유득공 (柳得恭·1749∼?)이 그의 저서 ‘고예당일기’에서 언급한다. “신라의 김이 김일제의 김인가?” 그러나 유득공은 더 이상 구체적으로 언급하지 않았다.
문무왕의 비문에는 문무왕의 선대(先代)가 누구 누구라는 것이 명확하게 밝혀져 있다. 그 선대를 표시하는 글자들은 ‘화관지후(火官之后)’니 ‘투후’니 ‘성한왕(星漢王)’이니 해서 지금 사람들이 보면 무슨 암호처럼 잘 알 수 없는 말이다. 그럼에도 문무왕 비문에 남아 있는 글자를 조립해 분석을 해보면 과거의 많은 금석문에서처럼 조상을 미화해서 신화로 꾸미는 가식이 없다는 점이 돋보인다.
비문에 남아 있는 문무왕의 출자는 문무왕 대에 이르기까지 모두 7단계로 구성돼 있다. 이 7단계 인맥 계보를 구체적 역사에 잇대어 설명해낼 수 있다면, 지금까지 이르지 못한 고조선이나 삼한 등이 이들과 어떤 관계에 있는가도 풀릴지 모른다. 비문의 다른 내용은 접어두고, 가장 주목되는 7단계의 출자 부분은 이렇다.

 

① 화관지후(火官之后): BC 2300년대
② 진백(秦伯): BC 650년대
③ 파경진씨(派鯨津氏): BC 200년대
④ 투후(?侯): BC 100년대
⑤ 가주몽(駕朱蒙): BC 50년대
⑥ 성한왕(星漢王): AD 20년대
⑦ 문무왕(文武王): AD 660년대

옆에 덧붙인 연도는 문자학회 김재섭씨가 주장하는 것이다. 문제는 ①의 ‘화관지후’가 사람의 이름인지 당시의 관직 이름인지 ②의 ‘진백(秦伯)’이나 ③의 ‘파경진(派鯨津)’이 무슨 뜻인지 모호하다는 점이다. 그러나 후대가 모르고 있을 뿐이지, 신라 문무왕 당시에는 이런 글자가 무슨 뜻인지를 알았기 때문에 이렇게 새겼을 것이다.
일단 결론부터 추단해 본다면 ①의 화관지후는 BC 2300년 경 관직 이름으로 현재로서는 삼황오제(三皇五帝)시대의 임금인 순(舜·재위 9년 BC 2320∼2312), ②의 진백(秦伯)은 진시황제의 20대 선조인 진 목공(穆公), ③의 파경진씨(派鯨津氏)는 진나라가 망하면서 안전지대를 찾아 경진씨를 파견한 휴도왕, ④의 투후는 김일제, ⑥의 성한왕은 김일제의 4대손인 김성(金星)으로 이 성한왕이 바로 김알지라는 것이다.

 


'신라인은 소호김천씨의 후예'

기타 역사서에도 이를 뒷받침할 만한 기록이 존재한다. 신라 6촌장들이 진나라에서 망명해 온 사람, 즉 ‘진지망인(秦之亡人)’이라는 ‘삼국지 위지(魏志) 동이전(東夷傳)’의 기록도 있고, 점필제 김종직의 ‘이존록(훙尊錄)’이나 ‘삼국사기 백제본기’ 끝머리에 붙여진 김부식의 논찬과 같이 “신라인이 소호김천씨의 후손이기 때문에 성을 김씨라고 했다”는 기록도 있다. 말하자면 한국 김씨의 선계가 소호씨 계열임을 말하는 것이다.
묘하게도 중국이 신화시대로 간주하고 있는 삼황오제시대의 한 사람인 소호김천(少?金天·재위 7년, BC 2474∼2468년)은 진나라와 연관된다. 진나라가 세워질 때 서방의 신을 모시고 나라의 기틀을 잡았다는 백제사(白帝祠)가 등장하는데, 여기에 등장하는 백제(白帝)는 소호김천을 가리키며 백제사는 소호김천을 위한 사당이었다. 또 진나라가 망하고 진나라 왕족 계열인 휴도가 서쪽 돈황으로 피난 가서 금인(金人)을 만들어 하늘에 제사지냈다고 하는 금인제천(金人祭天)의 금인(金人)도 소호신(少?神)을 이르는 말이 될 것이다.
이런 까닭으로 문무왕 비문에는 ‘투후는 하늘에 제사지낼 사람의 아들로 태어났다(?侯祭天之胤)’는 글이 등장하게 된다. 또 한나라 무제가 일제에게 성을 내리면서, ‘제천금인’한 휴도왕의 왕자니 성을 김(金)으로 했다는 것과도 연결이 될 것이다.
게다가 다른 것은 제쳐놓더라도 ④의 투후와 ⑥의 성한왕이라는 이름은 한나라의 역사서인 ‘한서(漢書)’에 관직 명칭으로 나온다. 실제로 ②의 진백과 ④의 투후 사이의 역사 기년을 추적해보면 진나라 멸망과 투후가 생긴 내력이 중원에서 일어난 일임을 알 수 있다. 한국의 족보와 관련해 가장 관심을 끄는 사항은 ⑥의 성한왕이 과연 신라 김씨의 시조인 김알지인가 하는 점일 것이다. 문무왕 기록은 이런 등식이 성립해야만 해독될 수 있다.
다시 당시의 역사 상황으로 되돌아가보자. 한고조 유방(劉邦)이 세운 한왕조는 13대 200여년 만에 왕망에게 나라를 뺏긴다. 그 후 15∼17년 만에 다시 나라를 찾게 되니, 역사에서는 이를 후한(後漢)이라고 부르며 이전의 전한(前漢)과 구별한다.
왕망(王莽·BC 45∼AD 23년)은 한왕실 10대 원제(元帝·BC 49∼33년)의 황후 왕씨(王氏) 가문 출신이다. 11대 성제(成帝·BC 33∼7년)가 즉위하자 큰아버지 왕봉(王鳳)이 대사마대장영상서사 (大司馬大將領尙書事)가 되어 정치권을 장악했고 왕망 역시 38세(BC 8년)에 재상격인 대사마(大司馬)가 되어 한왕실을 장악한다.
그런데 왕망은 김일제의 증손자인 당(當)의 어머니 남대부인(南大夫人)의 언니의 남편으로 당에게는 이모부인 셈이다. 당은 일제의 후손으로 이 당시에 투후 벼슬을 가지고 있었다. 이처럼 왕망은 투후 김씨 계열과는 외가 사이였던 것이다. 왕망은 9살의 어린 평제(平帝)를 옹립, 13대 제위에 올리고 자기 딸을 황후로 삼는다. 4년 만인 기원후 5년 어린 평제를 독살하고 9대 황제였던 선제(宣帝)의 현손인 2살짜리 영(孀)을 제위에 올리고 섭정을 하다 서기 8년에 한나라를 멸망시키고 스스로 ‘신제국(新帝國)’을 세웠다.
왕망이 김일제 이후 한왕실에 깊숙이 개입해 막강한 권력을 가졌던 김씨 계열의 힘을 업고 있었다는 것은 ‘한서 왕망전’에 상세히 나와 있다. 물론 왕망이 전권을 장악함으로써 외가인 김씨 계열은 모조리 정치 실세가 됐음은 짐작하고도 남는다. 그러나 왕망은 전국에 흩어져 있던 유씨들의 저항에 부딪혀 꿈을 펼치지 못하고 15년만에 망했다. 이렇게 됐으니 신제국에서 요직을 맡고 있던 김씨계는 필사의 탈출을 했을 것이다.
오늘날 중국의 요서와 요동, 한반도의 서북과 남쪽 김해 및 제주도, 바다를 건너 일본 규슈와 오키나와에 이르기까지 왕망때 만든 화폐 오수전(五銖錢)이 출토되는 것은 왕망과 정치일선에 같이 참여했던 세력이 목숨을 건지기 위해 대륙 밖으로 이동한 흔적이라는 것이 학자들의 공통된 시각이다. 따라서 문무왕 비문과 왕망의 시대를 종합적으로 고려해보건대 신라 김씨의 시조인 김알지가 바로 성한왕, 즉 일제의 5대손인 성과 같은 인물이라는 것이다.

흉노 관직명

※화관지후나 진백등의 관직이 흉노에는 없음ㅡ 그헣다면 화관지후가 삼황오제시대의 관직이라면 이 관직을 가진 종족이 이 삼황오제의 신화의 주인 종족이 된다.

 

사진 출처

https://ko.wikipedia.org/wiki/%EA%B9%80%EC%9D%BC%EC%A0%9C

 

月氏, 月支(월지)
타림 분지에서 동•서 무역을 독점하던 종족. 고대 인도유럽어족 토하라인의 일파로 추정된다. 흉노에게 멸망한 후 서쪽으로 간 세력을 대월지(大月氏)라 하고, 남아 있던 부족을 소월지(小月氏)라 불렀다.

 

월지의 이동과정. 지도의 연도는 오류가 극심하니 이동방향만 참고하자. 닝샤 후이족 자치구를 중심으로 광활한 하서지역에서 유목하며 흉노와 내몽골의 패권을 두고 다투던 월지는 기원전 176년 흉노족에게 패배하여 간쑤성으로 밀려났다. 흉노 노상선우 대(기원전 174년~161년)에 왕이 사로잡혀 죽임을 당할 정도의 대패를 당하고 간쑤성 하서회랑인 금성->무위->장액->주천->돈황->하미까지 이동했다. 이 지역에 남은 월지를 소월지라 부르고, 천산북로를 통해 더욱 서진한 주력 세력은 일리강 유역의 스키타이 샤카족을 밀어내고 정착했으나 기원전 130년대에 오손에게 밀려났다. 기원전 126년 장건이 대월지인 소그디아나에 도착했을 때 대월지는 다시 한번 샤카족을 밀어내고, 이미 그리스-박트리아 왕국까지 정복한 상태였다.

https://namu.wiki/w/%EC%9B%94%EC%A7%80

※경주 안압지의 원래의 명칭 또한 월지月氏

 

http://historybybluebird.tistory.com/332

 

※ 비약일수있으나 1936년 제11회 베를린 올림픽 대회 마라톤 1위 금메달을 목에 건 손기정선수의 유니폼에 왼쪽가슴엔 일장기가 그려져 있었고 국적 또한 일본이었다.

그의 국적은 일본이지만 그의 조국은 대한민국이었고 그는 일본에 예속된 식민국의 식민지백성일뿐 그는 여전히 한국인 그당시 조선인이었다.

아마도 한나라 기록 "사기"엔 "휴도왕"이 "흉노의 왕"으로 나오지만 그 당시 휴도왕이 지배한 지역은 여전히 월지족이 남아있는 소월지였다. 그가 원래 월지족의 왕의 자손이였는지는 더 알아볼필요가 있다.

그가 월지족이었다면 신라의 왕족은 월지족이 된다.

지금의 신장지역 위그르인들은 자신들을 월지족의 후손이라고 한다.

월지족은 자신들을 정령족 후손이라고 했으며 정령족은 산해경에 "말종족"으로 기록 즉 켄타우로스 혹은 켈트족(켈트족 어원이 켄타우로스임)이 된다.

{ 감숙성 무위시에 김일제의 동상이 세워져 있으며 마신(馬神)이라 전해져 내려온다 }

http://www.atlasnews.co.kr/news/articleViewAmp.html?idxno=198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