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 3. 16. 23:49ㆍ산해경 역사가 되다.
날 듯이 달리는 정령국
정령국(釘靈國) 사람들은 사람의 몸에 말의 다리를 하고 있는데, 그 다리는 긴 털로 뒤덮여 있다.
무릎 아래에 긴 털이 나 있고 두 발은 말의 발굽 같아서 날 듯이 빨리 달린다.
[출처] 날 듯이 달리는 정령국|작성자 올챙이
귀방
상나라 때 현재의 섬서성 동부, 산서성 북부, 내몽골 자치구 서부에 존재했으며, 황제와 인척 관계를 맺은 씨족인 대외씨(大隗氏)가 기원이라고 한다.[1] 유목과 수렵을 하며 살아갔고, 그 수령은 귀후(鬼侯), 귀공(鬼公) 등으로 호칭되었다. 상나라의 외부 위협이 된 민족으로, 《주역·기제(旣濟)》에는 "고종(高宗)이 귀방을 정벌하여 3년이 지나 크게 이겼다.[高宗伐鬼方,三年克之。]"라고 적고 있다. 그러나 귀방과 당시 화하족은 또한 인척 관계가 있었다.[2] 상나라의 제신은 귀방과 인척 관계가 있었고, 귀후(鬼侯)가 삼공(三公)의 반열에 있기도 했다.[3] 비록 적지 않은 문헌에 고종이 귀방을 정벌했다는 내용을 담고 있지만, 갑골문의 복사(卜辭) 중엔 귀방에 대해 정벌을 나갔다는 내용을 명확히 담은 문구는 없다.[4] 또한 귀방이 바이칼호에서 와서 몽골고원에서 주로 활동하였고, 또한 허타오 지역으로 남하해 황하를 돌아 섬서, 산서 지역으로 들어 왔고 적적(赤狄)으로도 지칭되었으며,
정령, 위구르 및 현재의 위구족, 위구르족의 조상이 되었다는 견해도 있다.[5]
귀방은 보통 곤융(昆戎), 낙천(洛泉), 곤이(昆夷), 곤이(緄夷), 관이(串夷) 등의 명칭과 혼용되기도 하였다. 청나라의 방준익(方濬益)은 "귀방은 서방 여러 융(戎)의 통칭이다."라고 하였다.[6] 또한 상나라 때에는 여러 소국들이 모두 방(方)으로 지칭되었는데, 이는 방(邦)의 의미에 해당하며 상나라에 복속되지 않은 세력에게 붙여지는 명칭으로 여겨진다.[7] 예를 들면 귀방 외에 토방(土方), 설방(𢀛方), 고방(苦方), 용방(龍方), 마방(馬方), 촉방(蜀方), 우방(盂方), 강방(羌方), 사방(𠭯方), 비방(轡方), 이방방(二邦方) 등이 있다.
현재 귀방이란 족속과 귀방의 발전에 대해 학계에서는 다양한 설명이 있는데, 정론은 아직 없다. 근대에 와서 왕궈웨이는 귀방은 곧 흉노의 전신이라고 여겼다.[8] 다만 현대의 학자 린윈(林沄)은 형질인류학, 자연환경 등의 관점에서 분석하면 선진 시대의 귀방 등 융적(戎狄)과 후세의 흉노 등 유목민족은 어떠한 관계도 없다고 하였다.[9] 고고학자들은 현재의 산베이(陝北) 지역의 리자야(李家崖) 문화를 귀방과 견주어 비교하고 있는데[10] 리자야 문화의 선주민들은 산지의 농업경제를 주로 하였고, 소량의 목축활동을 생업 형태로 경영하였다고 한다.[11]
같이 보기[편집]
↑ 杨建敏《黄帝·鬼方与大隗》
↑ 《大戴禮記‧帝繫篇》有提到陸終氏與鬼方氏的婚姻。
↑ 《帝王世纪》记载“纣以鬼侯为三公。鬼侯有女美,而进之于纣”。
↑ 王玉哲,〈鬼方考補證〉,收於《古史集林》,頁310。
↑ 方濬益,《綴遺齋彝器考釋》上冊(台北:台聯國風出版社,民國65年),頁 285
↑ 落合淳思『殷─中国史最古の王朝』(中公新書)p.51
↑ 王國維:《鬼方昆夷玁狁考》
↑ 林沄《戎狄非胡論》
↑ 呂智榮在〈鬼方文化及相關問題初探〉一文中說“而且在李家崖古城址中出土了‘鬼’字陶文。 我們以上述資料研究進而認為,李家崖文化是與鬼方先民有關的文化遺存,當稱它‘鬼方文化’。”
↑ “陕北发现商代宏大重楼环屋形建筑群”. 2020년 3월 25일에 원본 문서에서 보존된 문서. 2019년 9월 15일에 확인함.
당시 흉노족은 자신들의 군장을 하늘에서 내려준 천자라는 뜻으로 ‘선우’라고 하였다. 그런데 이 ‘선우’라는 말에도 ‘단군’의 뜻이 담겨져 있다. 우선 ‘선’은 ‘단’으로도 읽힌다. ‘단檀은 하늘에 제사올릴 선’과 같으며 선禪과도 통하는 글자이다. 그래서 단군을 선군이라고 호칭해야 한다는 주장도 있다. 즉 흉노족의 군장인 선우는 단과 같은 의미인 선이 그 어원임을 알 수 있다. 이는 그들의 뿌리가 조선이며, 상국인 조선의 제왕 호칭을 직접 쓰지 못하고 우회적으로 사용했음을 보여준다.
흉노족의 뿌리가 조선이라는 사실은 그 풍속을 살펴보아도 쉽게 알 수 있다. 사기 흉노전은 그들의 풍속에 해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새해 정월에는 모든 장이 선우의 정(도읍)에 모여 작은 집회를 열고 제를 올린다. 5월에는 농성(하늘에 제를 올리는 장소)에서 대집회를 열고 하늘과 땅과 조상에게 제를 지낸다. 가을철에는 대림(초목의 풍성을 기원하는 제사장소)에서 큰 집회를 열고 백성들과 가축의 수를 조사한다.”
이러한 내용을 삼국지 동이전에 기록된 우리민족의 풍속과 비교해 보자.
“부여에서는 큰 정월에 하늘에 제를 올리고 국중대회를 여는데 이를 영고라 한다. 이때에는 형벌을 집행하지 않으며 모든 죄수를 석방한다.”
“마한은 5월에 곡식을 파종한 뒤에 조상께 제를 올리고 무리지어 가무와 음주를 밤낮으로 한다. 10월에 농사일이 끝나면 역시 이와 같이 한다.”
부여와 마한, 흉노족의 풍속이 조금도 다르지 않음을 알 수 있는데, 이는 흉노족의 뿌리가 조선이라는 단군세기의 기록을 뒷받침한다, 다만 흉노족은 유목생활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로 인해 다소 차이가 있을 뿐이었다.
1.막조선의 유민들중 중국내륙과 북부에 거주하던 사람들을 중국놈들은 정령,고차->철륵,돌궐 -> 흉노,돌궐등으로 시대에 따라 명칭을 달리했다.
모두가 투르크계인데 투르크라는 말 자체가 돌궐에서 왔다.
어쨌든정령,고차의 지류가 철륵인데 ,철륵은 돌궐이외의 투르크계를 부르는 말이라고 했다.
그리고 흉노도 투르크계가라고 했으니, 결국은 중국 북부와 서부에 걸쳐있던 세력중
돌궐계통과 나머지 철륵의 계통으로 나눠진다고 볼 수 있다.
2. 단군조선의 유민들 중 초기에 서쪽으로 이동한 세력은 흉노라 불리웠고,후기에 이동한 세력은 돌궐이라 불리웠다.
철륵의 여러 부족중 가장 강성하고 가장 오랫동안 남은 종족이 흉노(훈족)가 된다.
돌궐이 후에 오스만 투르크,셀주크 투르크 제국을 통해 아시와 유럽을 잇는 강대한 나라를 건국했기에 서양발음화되어 투르크로 남아있는 것이며, 터키가 그 이름을 그대로 가지고 있는 것이다.
3. 단군조선의 후예들은 초기에 훈제국을 통해 로마를 멸망시키고 유럽과 아시아를 잇는 역할을 했으며, 후기에는 투르크 제국을 통해 이슬람 문화를 일으켜 세계역사를 주도하였다.
할미꽃당신 | 한민족의 대륙사 - 흉노와 돌궐,정령,고차 - Daum 카페
기원전2000년경에 제작된 이란 수사의 유적 정령국 사람들과 서왕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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