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론91.<관자(管子)>에 복희가 처음 구구단을 만들고, 「산해경(山海經)」에 동이족 소호가 가야금을 만들고 <초사(楚史)>에 복희가 처음 금슬(琴瑟)을 만들고,산해경에 동이족 안룡(晏龍)이 거..

2022. 9. 10. 16:58고조선

황제의 도는 무엇이고 요순의 도는 무엇인가.

황제의 아비 소전은 동이족 신농씨의 아비인 소전이며, 황제는 일찌기 청구에 이르러 풍산을 지나다가 태호 복희씨와 동문수학한 발귀리(發貴里)의 후손 자부선사를 만나 가르침을 받고 『삼황내문』을 받아가서 황노지교라 칭하는 도교의 기반을 구축하지 않았던가?

이는 그들의 가르침이 이같이 독자적인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산해경(山海經)」<해내경(海內經)>을 보면 염제의 손자 백릉이 오권(吳權)의 아내 아녀연부(阿女緣婦)와 정을 통했는데 연부가 잉태한지 3년만에 고(鼓), 연(延), 수를 낳았으며 고와 연이 처음으로 종을 만들고 악곡을 만들었다고 나온다.

또한 <제왕세기(帝王世紀)>에 태호 복희는 소를 길들여 이용하고 말을 탔으며, 희생(犧牲)을 취하여 주방에 주어 굽고 지지게 했다고 했다.

<관자(管子)>에는 복희가 구구단을 만든 것으로 나오고, <초사(楚史)>에는 복희가 처음으로 금슬(琴瑟)을 만들었다고 나온다.

이 사실 하나만 가지고도 우리는 문명의 뿌리가 어디에서 기원했는지 알 수 있다. 즉, 요한 계시록을 보면 다음과 같은 귀절이 나온다.

"내가 하늘에서 나는 소리를 들으니 많은 물소리도 같고 큰 뇌성도 같은데 내게 들리는 소리는 거문고 타는 자들의 그 거문고 타는 소리와 같더라."

그런데, 엉터리 왜곡사서 <삼국사(三國史) 樂>편을 보면 무어라 나오느냐 하면, 가야국 가실왕이 당나라 악기를 보고 이를 만들었다고  하여 국악이 당악을 모방했다고 헛소리를 하고 있다.

과연 그런가?

우륵이 거문고를 창작한 것이 아닌 것은 사실이다. 따라서 우륵이 거문고를 창작했다는 주장 역시 견강부회(牽强附會)에 불과하다.

그러나 서기 550년대에 살았던 우륵이 서기 618년에 비로소 건국된 당나라 악기를 보고 가야금을 만들었다는 것은 이만저만한 견강부회(牽强附會)가 아닐 수 없다.

「산해경(山海經)」 <대황동경(大荒東經)>을 보면 조(鳥) 도등족(따라서 동이족) 소호가 전욱을 키운 대학(大壑)이 있는데 소호가 거문고를 버려 두었다고 나온다.

소호씨가 가야금을 만들었음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또 「산해경(山海經)」<해내경(海內經)>을 보면 제준(帝俊)이 안룡을 낳았는데 안룡이 거문고와 비파를 만들었으며(帝俊生晏龍, 晏龍是始爲琴瑟) 제준(帝俊)이 아들 8인이 있어(帝俊有子八人) 노래와 춤을 시작했다는 기록이 있다.

소호 금천씨가 누군가. 복희의 후예가 아닌가? 이 기록의 주석은 물론 거문고를 처음 만든 이는 복희,  신농이고 위(爲) 앞에 무(務)를 첨가해 안룡이 즐긴 것으로 해석하는 것이 순조롭다 했다.  

역사의 뿌리를 추적해서 실마리를 찾아 근원을 살피면 산해경 자체가 다 동이 제 족의 종합적 역사, 지리, 신화서 임을 확인 할 수 있다. 눈만 열리면 아니 사관만 열리면 누구나 확인 할 수 있다.

「산해경(山海經)」 <대황서경(大荒西經)>에 보면 음악을 시작한 동이 족으로부터 구변과 구가를 훔친 기록이 사실대로 나온다.

"서남해의 밖, 적수(赤水)의 남쪽, 유사(流沙)의 서쪽에 사람이 있어 두 마리의 푸른 뱀을 귀에 걸고 두 마리의 용을 타고 있는데 이름을 하후개(夏后開)라고 한다.

개는 세 차례 하늘에 올라가 천제의 손님이 되어 구변(九辯)과 구가(九歌)를 얻어가지고 내려왔다.

이 천목지야(天穆之野)는 높이가 2000길인데 개가 여기서 처음으로 구소(九招:순이 제정한 九韶의 원본)를 노래했다.

대만의 석학 서량지(徐亮之) 교수는 「중국사전사화(中國史前史話) 」에서 '동이족의 음악교육이 중국역사가 시작되기 전부터 그 이름이 높았다(동이적음악교육(東夷的音樂敎育), 재중국사전야(在中國史前也), 부성명(負盛名))'고 말하고,

중국의 많은 춤과 악기는 모두 동이인이 창안한 것이라 하여 '가견중국허다악기(可見中國許多樂器), 무도(舞蹈), 도시동이소창선(都是東夷所創選)'이라 했다.